하늘재~포암산~대미산~작은차갓재(백두대간15구간)
산행일자 : 2006년 01월 15일
산행장소 : 하늘재~포암산~대미산~작은차갓재(백두대간15구간)
산행모임 : 대전 한겨레산악회
날 씨 : 구름조금
새벽 03시에 일어나 04시에 집에서 나와 서부경찰서 앞에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시민회관과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신탄진등을 경유해서 오창 휴계소에 정차했다
휴께소에서 아침을 먹고 08시경에야 목적지인 하늘재에 도착했다.
회장님이 산행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회원님들 전원은 기념촬영을 하고 드디어 가슴설레는 대간길에 오르기 위해 하늘재에서 포암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위 사진은 김재성님의 작품*
내게는 이번 대간길이 처녀 산행이라서 그런지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끌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발 한발 내딧기 시작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진아가 힘들어 하기 시작했고 지나가시던 회장님과 강희산님이 걱정을 하시며 앞서 지나가시고 우리는 뒤 쳐지기 시작했는데 멋진 소나무와 기암 괴석이 나타나서 진아에게 사진 한장 찍자고 제안했다.
진아는 야속하게 한 마디로 거절했다.
아마도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가시던 김재성님께서 누가 모델을 안 서냐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포암산에 오를 수 있었다.
포암산에서 사진을 찍고,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능선을 따라 걸으며 주변 산들을 바라 보는데 안개가 많아서 제데로 보이지 않는게 정말 아쉬웠다.
"이곳은 날씨가 좋으면 조망이 아주 좋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몇장 담아본다.....
얼마나 걸었을까?
봉우리를 여러게 넘고 한 봉우리에 오르니 넚은 너덜 바위가 나타났고 회원님들이 휴식을 취하며 황간 아가씨가 나누워 주는 곶감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와 진아도 맛있게 얻어 먹었다.
황간 아가씨는 등산화 끈을 고쳐매고, 여러 사람이 일제히 바라보고 있는중에 총무님 왈 " 등산화 끈 매는게 그렇게 신기해요" 여러사람이 한바탕 웃었다.
십 여분 휴식 후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눈이 아직 녹지 않은데도 많고, 가파른 바위로 이루어진 비탈길도 많고 해서 채력이 많이 소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험한길을 걸은지 한 시간여가 지나서 생리 현상을 해결 할려고배낭을 내려 놓고 일행들을 먼저 보냈다.
잠시 후 홀로 제법 높은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 했느데 몸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리 근육은 갑자기 뭉치고 몸에서는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앞서가는 일행들을 따라 잡으려는 욕심에서 걸음을 재촉 한 탓이려니 했는데 봉우리를 오르면 오를수록 몸은 천근 만근 무거워 지기만 하는게 아닌가.....
머리 속에서 갑자기 종산제 뒤풀이때 신탄진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산이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느 느낌...."
이러다 대간길을 못 가는것은 아닐까?....
내 채력이 고작 이정도였는가?....
머리 속에서는 별의별 생각들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명산 산행에서는 누구에게도 뒤 쳐지지 않던 나였는데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 여석번 아니 열 댓번을 쉬고 봉우리에 오르니 똘이장군님이 물병을 주며 마시라고 권했다.
나는 물은 마셨다고 사양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뒤 따르던 똘이장군님이 나에게 대간 산행길에 대해 여러가지 유의 할 점들을 이야기 하는중에 선뜻 내 머리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간길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구나.... 그리고 오늘 산행길은 여덜 시간을 예상 한다고 회장님이 이야기 했으면, 대간길이 처녀 산행인 나에게는 열 시간은 걸릴 수도 있겠구나.... 내가 너무 서둘러서 걸은게 아직 준비되지 않은 몸에 무리를 주었구나...."라고.
뒤 따르며 조언 해 주는 똘이장군님이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 식사를 하는 분들과 식사를 하려고 준비하는 진아와 일행을 만났다.
신탄진 선배님은 나에게 뜨거운 차 한잔을 권하며 눈빛으로 경려를 보냈으며, 최영장군님은 맛있는 라면을 끌여서 나누어 주었다.
일행들과 음식을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쌍화차?를 마시고 나니 불과 삼십 여분 전에 이상했던 몸은 정상적인 몸으로 회복 되었다.
회복된 가벼운 몸으로 한 두 시간을 걸으니 대미산이 나를 반겨 주었다.
대미산에서 십 여분 휴식을 취하니 부 회장님과 사모님께서 도착했다.
후미는 십 여분 후면 도착 한다고 하셔서 기다렸다가 함께 새목재를 향해 내려오는데 눈이 녹지 않아서 마치 스키를 타듯이 내려와야 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물샘 칠 십미터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도 앞서가서 기다리는 회원님들을 생각하며 지나쳐야 만 하니 마음이 씁씁했는데, 최영장군님은 그 사이에 다녀 왔다니 부럽기만 했다.
*위 사진은 김재성님의 작품*
한 시간여를 더 걸으니 차갓재가 나와서 사진을 찍고, 다시 작은 차갓재를 향해 서둘러서 봉우리를 지나 내려 오는데 해는 벌써 건너 산 능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는 해가 야속하다는 생각이든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가운데 지점인 차갓재.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이라 쓴 장승 사이로 문경 `산들모임`에서 세운 기념 표석이 서 있다.***
작은 차갓재에서 잠시 후미를 기다리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니 이미 다른 회원님들은 김치찌게로 속을 달래고, 몇몇 회원님들은 모닦불 앞에서 담소를 나누며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이 해주셨다.
첫 대간길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우리가 올때까지 기다려 주신 회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대간산행에서 나는 지금 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산이 나를 허락하는 것이지 내가 산을 정복할 수 는 없다는 것.
-산행에서 절대로 마음만 앞 새워서는 안 된다느것.
-산행시 동료들이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
이번 대간산행에서 고생하신 모든 회원님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치찌개는 일품 이었습니다.
다음 대간산행때도 많은 지도 부탁 드립니다.
2006년 01월 17일
강일구
*** 산 행 자 료 ***
포암산
포암산(포암산·962m)은 하늘재를 지키고 선 산이다. 문막마을에서 올려다보면 정상부의 암벽이 마치 베를 널어놓은 것 같다하여 포암산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예전에는 하늘재의 옛지명인 계립령에서 이름을 빌려 계립산(鷄立山) 마골산(痲骨山)으로도 불리었다.
포암산은 바위와 노송 등이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경치가 곳곳에 널려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마폐봉에서 부봉을 거쳐 돌아드는 주흘산과 월악산 등의 산군이 일품으로 사계절 내내 산행할 수 있는 곳이다.
대미산
대미산(大美山·1115m)은 문경시를 지나는 백두대간의 어미 되는 산이다. 조선 영·정조 때 발간된 문경현지에는 대미산을 문경제산지조(聞慶諸山之祖)라 적고 있다.
대미산에서부터 문경구간의 백두대간이 시작된다는 의미와 함께 문경의 산들 중에서 높이로도 가장 높다는 뜻이다.「산경표」나 문경현지에 적힌 지명은 대미산(黛尾山) 즉, '검은 눈썹의 산'이다.
어디에서 보거나 크게 두드러져 뽐내는 모양이 아닌 그저 있는 둥 마는 둥 부드러운 능선이 흐르다 정상부에 꼭 눈썹만큼의 봉우리를 돋아 놓았을 뿐이다. 부드러움으로 대변되는 대미산은 오름길이 가파른 곳도 있지만 험악한 모양을 한 곳은 없다.
황장산
황장산(黃腸山·1077m)은 문경시 동로면 한가운데 솟아 있다.
「산경표」에 기록된 본래의 이름은 작성산(鵲城山)으로 문안골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인 작성산성에서 유래했다.
황장산은 임금이 거닐던 뜰이라 해서 황정산(皇庭山), 조선시대 이곳의 황장목을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봉(封)했다 하여 황장봉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황장산은 좋은 목재로 손꼽는 황장목이 많은 산이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지금도 능선 중간 중간에 자라 있는 소나무는 예사롭지 않은 기품을 보이며 바위들과 어울려 선경을 연출한다.
바위로 험악한 지형도 있지만 문안골이나 우망골 토사골처럼 반나절은 품을 팔아야 하는 부드러운 계곡도 있다.
하늘재(계림령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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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520m). 백두대간에 열린 고개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름을 단 곳이다.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이 고개가 하늘재로 불리게 된지는 모르겠으되 옛 기록상의 이름은 계립령(鷄立嶺)이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4)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이 열렸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로 죽령보다 2년 앞선다.
하늘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툼을 벌이던 곳이다.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곳으로 길을 열었다. 고구려의 장군 온달은 “계립령,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죽어서 돌아오지 않겠다”며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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