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이야기

계룡산(鷄龍山) 자락의 갑사(甲寺)

작은岳馬 2007. 1. 18. 11:49

 

 

계룡산(鷄龍山)을 넘어 갑사(甲寺)까지

 

 

 

장군봉으로 향하는 산행로의 암릉

 

 

 

 

 

장군봉 정수리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쌀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장군봉 정수리에서 바라본 황적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장군봉의 암장

 

 

장군봉에서 삼불봉을지나 관음봉으로 일어지는 능선

 

 

 

 

 

 

삼불봉과 천왕봉 그리고 소나무

 

  

 

큰배재의 전경

 

 

 

 

남매탑고개

 

 

    

 

삼불봉을 등지고

 

 

남매탑

 

 

 

삼불봉을 바라보며

 

 

삼불봉고개

 

 

금잔디고개의 전경

 

 

 

갑사 강당(講堂 지방문화재 제95호)


갑사의 해탈문(解脫門)과 대웅전(大雄殿)사이에 위치하고있는 이 강당(講堂)은 원래 승려들이 법문(法文)을 講論(講論)하던 건물로 맞배지붕에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多包)집이다. 기단(基壇)
은 자연할석으로 낮게 쌓고 입구에는 계단을 설치했다. 주초(柱礎)도 자연석을 이용했다. 중앙의 어칸에는 3구, 양쪽 협칸에는 2구씩의 공포를 배치하고, 내,외 2출목(內, 外二出目)이며 포작(包作)의 구성은 앞·뒷면이 같다. 기둥은 배흘림을 주어 안정감이 있다. 단청은 완전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며, 창틀은 개수되어 원형이 아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架構)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 건축이다.

 

 

 

 

 

 

 

갑사(甲寺)

소재지: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甲寺)는 본래 백제(百濟) 구이신왕원년(久爾新王元年)인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창사문제는 확증할 수 없으며, 또한 무령왕(武寧王) 3년인 503년에 천불전(千佛殿)을 중창하였고 위덕왕(威德王) 3년인 556년에 혜명대사(惠明大師)가 천불전(千佛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갑사(甲寺)는 130여 년이 지난 뒤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당우(堂宇) 1000여간을 증축하고 이에 화엄종(華嚴宗)의 도장(道場)으로 삼아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의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이 사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몇 번의 동, 개축이 이루어진다. 즉 선조(宣祖)30년에는 왜란에 의해 소실되어 폐허화되었으나 선조 37년인 1604년에 이곳 사증(査證)들에 의해 우선 대웅전(大雄殿)과 진해당(進海當)이 중건되고 이어 효종(孝宗)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 중수하였다. 이어 고종(高宗) 12년인 1875년에도 사증(寺憎)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 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默堂)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갑사는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寂默堂)인 요사(寮舍)가 있다. 이외 종각(鐘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하나의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요사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當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위치는 아님을 나타낸다. 원사당지의 대형 이동은 임난후의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 외에 주요문화재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 배살입상, 사적비(史蹟碑)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경역(寺境域) 주변에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대적암(大寂庵), 신흥암(新興庵)등 5개의 부촉암(咐囑庵)을 거느리고 있다. 

 

 

 

 

갑사 대웅전(大雄殿 지방문화재 제105호)


이 건물은 갑사의 본전(本殿)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宣祖) 37년(1604)에 중건하였다. 원래의 대웅전은 현재 대적전(大寂殿)이 있는 부근으로 보이며, 중건시 이건(移建)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 주초(柱礎)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간격은 가운데 3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아 공포를 2구씩 배치하고, 협칸에는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내외3출목으로 쇠서는 완만하게 휘어있고 대체로 조선시대 중기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초각(草刻)도 눈에 띈다. 내부는 우물천장에 닫집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석가여래불상(釋迦如來佛像)을 안치하고 있다.

 

 

 

 

 

 

 갑사 삼성각(甲寺 三聖閣 문화재 자료 제53호)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아도화상이 처음 지었고, 통일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의상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고치고 넓혀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성각(三聖閣)은 칠성(七星)·산신(山神)·독성(獨星)의 삼성(三聖)을 모신 곳이다. 건물 이름이 삼성각 인 이유는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한다.
칠성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수명장생(壽命長壽)을 주관하는 별이다.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난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신이며, 독성은 혼자 깨달은 성자(聖者)를 말한다.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지어 삼성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삼성각 안에 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사 동종(甲寺 同宗 보물 제478호)

이 종은 갑사 해탈문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있으며 새로 지은 사모지붕의 종각 안에 있다. 이 동종의 종신부(鐘身部) 윗 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네 다리와 몸체로 유(종을 매다는 꼭지)를 이루어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며, 용통(甬筒)은 없다. 각 부분의 표현이 웅건(雄建)한 수법으로 조성된 우수작이다. 종의 어깨부분에는 물결모양의 꽃무늬를 원형으로 두르고 바로 밑에는 위아래로 구획하 여 위에는 연꽃무늬, 아래는 범자(梵字)를 촘촘히 배치하였다. 이 횡대(橫隊)에 거의 붙어 있는 방형(方形)의 유곽(乳廓)안에 9개의 유는 연꽃무늬 가운데 원형으로 튀어 나왔다. 이 네모난 유곽띠 안은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되고 유곽은 대칭되게 4개가 있다. 당좌(撞座)는 구름무늬로 받쳐진 원형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을 잡은 늘씬한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있다. 밑부분 종구 위에 연꽃무늬와 보상화(寶相華) 무늬를 교대로 한 당초문(唐草紋)띠가 있다. 몸체에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 선조(宣祖) 17년(1584)에 만들었음과 갑사의 절 이름도 당시는 갑사사(甲士寺) 였음을 알 수 있다.

※감상포인트
선조 17년에 만들어진 동종은 종 위에 음통이 없어 조선시대 종의 면모를 보여준다.

 

 

 

 

 

 

 

갑사 철당간 및 지주( 甲寺 鐵幢竿 支柱 보물 제256호)


갑사의 철 당간은 원래28개의 철통이 이어져 있었는데, 조선말 고종30년(1893)에 벼락으로 4개가 부러져 나갔다고 한다. 지름이 50cm의 굵기인 철통이 24개가 연결된 현재의 길이는15m이다. 현재 기단부의 대석(臺石)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고 장대한 두 개의 장방형(長方形)의 기단석만이 노출되어있다. 노출된 두 개의 기단석에는 각면에 안상(眼象)을 음각 하여 장식하였는데 그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의 안장 장식기법과 같다. 동서(東西)로 맞서 있는 두 개의 지주(支柱)는 아무런 장식 없는 소박한 지주로서 맨 위의 정상부는 평평한데 바깥쪽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죽여 활모양으로 그리며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문무왕(文武王) 20년(680)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당간지주는 양식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위 사진들은 전년 12월 28일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금년 1월 1일 지리산 천왕봉 해맞이 산행을 가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아픈 허리를 달래며 산행한 사진을 올린 것입니다.

계룡산 산행보다 갑사의 철당간이 매우 인강 깊었습니다.

 

2007년 01월 30일

 

강일구

 

첨부 : 2008년 01월 01월 계룡산 일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