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이야기

광덕산(廣德山)

작은岳馬 2006. 12. 19. 16:09

 

광덕산(廣德山 699m)

 

산행일자 : 2006년 12월 17일

 

산행장소 : 광덕산주차장~광덕산(廣德山 699m)~장군바위~광덕사(廣德寺)

 

산행모임 : 대전한겨레산악회 (33명)

 

산행날씨 : 영하의 추위속에 많은 눈

 

북한산(北漢山) 산행을 떠나는 날이라 들뜬 마음으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 온 세상에 하얀눈이 수북이 쌓여 은빛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솜사탕 같은 눈을 감상하다 문득 불길한 예감에 TV를 켜고 뉴스를 들으니 "북한산 일부통제, 정릉길 차량통제"라는 좋지 않은 뉴스가 흘러 나온다.

그래도 서울로 이동하는 동안에 입산통제가 해제 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배낭을 꾸려 용문네거리에서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시민회관과 원두막을 경유해 신탄진을 지나는 가운데 버스안에서는 빈좌석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 온다.

오늘 북한산 산행 예약을 해 놓고 불참한 회원들이 12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산을 좋아해 산을 찾는다는 사람들이 날씨가 춥다고 혹은 비나 눈이 많이 온다고 미리 예약해 놓은 산행에 일언반구(一言半句)  없이 불참하다니 우리 나라의 예약문화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쯔쯔쯔

 

버스가 천안으로 들어설 즈음 부대장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북한산관리소에 전화를 걸어 입산통제가 언제나 해제될 수 있는지 문의 하니, 관리소 직원은 단호이 "오늘 하루는 입산통제를 해제 할 계획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버스를 잠시 천안휴게소에 정차하고 이대로 서울로 상경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지를 놓고 각론(各論)을 벌인 결과, 북한산으로 향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고 그렇다고 충북이나 강원도에 있는 산으로 향하기에는 늦은 시각이라 판단하여 가까운 천안에 있는 광덕산(廣德山 699m)을 찾기로 한다.

  

 

광덕산(廣德山)은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송악면과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아산시 송악면과 광덕면 광덕리의 경계에 있는 천안에서 가장 높은 699m의 산이다.

예로부터 산이 크고 풍후(豊厚)하여 덕이 있는 산이라 하여 "廣德"이란 이름을 가졌다 한다.

광덕산은 명산으로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광덕산 부근에서 생산한 호두는 껍질이 얇고 알이 꽉 차서 천안시의 대표적인 명산물이다.

산에는 광덕사, 잣나무 군락지, 장군바위, 강당사 등의 볼거리가 많으며, 광덕사에는 고려사경(보물 390)·광덕사 대웅전(충남문화재자료 246)·광덕사 삼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20)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이밖에도 호도나무 전래비와 조선시대 기생 김부용의 묘가 있다.

 

 

산행 전 주장에서 장나기가 가득한 똘이장군님의 모습...

 

 

 

광닥산 곳곳에는 유난이 분묘와 빗돌들이 많다...

 

 

  

정상으로 향하는 산행로 중간의 쉼터에는 2000년 2월 20일 천안의 한 산악회에서 빚어 세워 놓은 빗돌이 있는데 그 빗돌에는 노산 이은상(李殷相)님의 "산악인의 선서" 라는 글이 씌어져 있다.

 

산악인의 선서

 

산악인은 무궁한 세게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 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 할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노산(鷺山)·이은상(李殷相) : 1920년대 후반에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한 뒤로 시조의 현대화에 힘썼고, "가고파, 봄처녀" 등의 작사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 호는 노산(鷺山)·강상유인(江上遊人)·노산학인(鷺山學人)을 사용했다.

 

  

 

 

 

 

 

한겨레의 새 일꾼으로 기대되는 "고바우"님

 

 

 

 

 

 

 

 

광덕산(廣德山 699m) 정수리에 오르니 넓은 헬기장에는 온통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고 가장자리 한편에서는 광덕산에서는 유명한 분이 일명 "산삼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다.

산 정수리에서 막걸리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 관할 관청이나 주민들 그리고 산행객들 사이에서 찬반양론(贊反兩論)이 분분하였으나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정수리 헬기장에서 조금내려선 곳에 광덕산 빗돌과 "광덕산에 올라"라는 글 귀가 씌어져 있는 빗돌이 눈을 맞고 있어 그 모습을 담아 본다.

 

광덕산에 올라

 

가뿐 숨 가다듬고 장군바위 타고 넘어 지팡이 몸을 실어 山頂에 올라보니

크고작은 산줄기 발 아래 엎드리고 안개 자욱한 골에 구름이 머흘레나

태고적 신비 가슴에 묻고 마르지 않는 精氣로 마음을 다스리며

千年歷史속에 말이 없더니 아산만 물줄기 호령하여 새 時代를 열개하고

서해바다 품에 안고 기지개 편다.

이름모를 산새는 사랑을 노래하고 땀 식은 이마에 산바람이 시원하다.

詩人 아님에도 時心이 절로 일어 나음선사 時 한 구절 읖조려 본다.

淸山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蒼空은 나르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장군바위에서...

 

 

 

 

장군바위에서 광덕사쪽으로 향해 내려서는 산기슭에 지은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듯한 기와집 한 채가 함박눈을 맞으며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어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그 기와집을 구경하려 했으나 입구에는 굳게 자물쇠가 채워진 철문이 가로막고 있어 아쉬운 순간이다.

 

 

 

광덕사 (廣德寺)

 

광덕산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관리를 받고 있는 말사(末寺)이다.

마곡사는 광덕산 너머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652년(진덕여왕 6년)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 1과와 사리 10과, 금은자()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 각 2부 등을 승려 진산()에게 주어 새 도량()을 연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1464년(세조 10년) 세조가 이 곳에 거동하였을 때 한계희()에게 명하여 전지()를 써 내렸는데, 위전()를 바치고 각종 요역(徭)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28방()에 부속암자가 약 89개, 9개의금당(), 80칸의 만장각(), 3층으로 된 천불전(殿)은 불교도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번창하여, 경기 ·충청 일대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는 대찰이 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려, 가까스로 대웅전 ·천불전만 중건되어 큰 절의 명맥만을 유지하였고, 1981년 대웅전 ·천불전 등을 신 ·증축하였다. 광덕사 고려사경()인 보물 제390호 "금은자 법화경" (6책)과, 천불전의 대형 후불탱화 3점, "금자사적기(), 세조어첩()" 등 문화재가 있다.

그런데 1680년(숙종 6)에 안명로()가 쓴 이 "사적기"는, 이 절의 개창을 신라 흥덕왕 7년(832)으로 적고 있는데, 자장을 흥덕왕 때 사람으로 착각한 듯하다. 또 "태종실록" (28권)에 따르면, 1414년(태종 14) 가을에 왕명으로 "대반야경() (전부)을 일본의 승려 규도()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덕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보화루 우측으로 보이는 호두나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호두나무로,  고려 충렬왕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던 유청신 이란 문신이 묘목과 열매를 가져다 광덕사 경내에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호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98호 (수령400년)로 지정 되어 있다.

 

특히 광덕산 동쪽 기슭에 있는 주변 마을은 호두 나무가 집집마다 있는데 광덕사 입구에 호두 기념비까지 있다. 그 비명에 있는 글귀를 옮겨본다.

"호두나무가 우리나라에 전래 된 것은 고려 충렬왕 16년 류청신 선생이 원나라로부터 왕가(王駕)를 모시고 올 때, 열매와 묘목을 가져와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열매는 광덕면 매당리 고향의 집 앞뜰에 심은 것이 시도이며 그 후 선생의 후손 및 지역주민들이 정성껏 가꾼 결과 호두의 주산지가 되었다. 이 고장 호두의 효능으로는 머리를 맑게 하여 주고 살결을 곱게 할 뿐 아니라, 노쇠를 방지하여 주며 독특한 맛과 높은 영양가로 인하여 식품의 원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이곳의 오밀한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어미 품속 같은 아늑함을 간직한 699m의 광덕산 가슭 아래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광덕사와 더불어 이 고장의 자랑이라 하겠다."

 

 

광덕사 대웅전 (廣德寺大雄殿)

 

광덕사의 대웅전은 광덕사에 있는 당우(堂宇)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46호로 지정되었다.


광덕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서 자장()이 창건하고 흥덕왕 때 진산화상()이 중건하였으며 조선 선조 때 희묵상인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충청·경기 지방에서 가장 큰 절의 하나였으나 왜란으로 불타버리고 대웅전과 천불전(殿:충남문화재자료 247)만 중건되었다.

대웅전은 1981년에 증축되었고 1983년 광덕사를 완전 해체 복원할 때 기존의 건물보다 크게 건립되었는데 구조는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창호는 격자무늬
이다. 안에는 석가여래상·약사여래상·아미타여래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화기()에 ‘건륭 6년()’이라고 되어 있으며 화원()은 수당()과 붕우() 사혜인찰()이라 기록되어 있다. 건륭 6년은 1741년(영조 17)이다.

1983년 해체 복원시 기존의 주춧돌·목재 등을 방치하여 현재 건물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부족하다. 대웅전 앞에는 호두나무가 1그루 있는데, 700여 년 전 유청신()이 중국에서 들여와 심은 것이라 한다. 원래 광덕사 일대는 호두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광덕사 삼층석탑 (廣德寺三層石塔)

 

광덕사 삼층석탑은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광덕사 대웅전(殿:충남문화재자료 246) 앞 뜰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2.8m이다. 기단은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1층 기단 면석()에는 8개의 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2층 기단 면석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다. 갑석() 상면에는 탑신을 받는 옥신괴임이 1단으로 높게 조각되었다.

1층 탑신과 옥개는 각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탑신 동측면에는 문비()의 열쇠가 모각()되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었는데 옥개의 낙수면의 경사도가 심하고 처마도 반전되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양식과 수법이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신라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뒤, 대웅전 계단 양측에는 광덕사 석사자(:충남문화재자료 252) 2기가 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으로 오르는 계단 위에는 "그대 발길 돌리는 곳" 이란 글귀가 씌어져 있어,  종각의 회손을 막고 있다.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로, 시대적용 기타 네 기둥(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들을 걸어 사찰의 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의 일주문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 통도사의 경우는 문의 중앙에 ‘영축산 통도사’라는 현판을 걸어 사찰의 이름을 밝히고 좌우의 기둥에 ‘불지종가()’와 ‘국지대찰()’이라는 주련()을 붙여서 이 절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광덕사 부근에는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매창)으로 비록 기생신분이나 첩으로 정조를지키며 350여편의 많은 시를 남겼다고 전해지는 운초.김부용(金芙蓉)의 묘가 있으나 사전 자료가 부족하여 그 묘를 보고오지 못한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부용(金芙蓉)의 자는 운초(雲楚)요, 호는 부용(芙蓉)이다. 성천의 몰락한 양반가 태생인 미색으로, 가무와 시문에 능하였다. 12살에 기적에 올라 당시 시인 묵객들과 풍류를 나누었다. 성천 신임 사또의 소개로 19살에 영천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을 만나 그 소실이 되어 15년간 모시다가 92세로 낭군이 돌아가시자 그때 쓴 낭군의 묘에서 쓴 한시가 비석에 있는 시입니다.

 

다음 한시는 부용(芙蓉)을 보고 반한 당시 어느 시인의 글입니다.

芙蓉當上芙蓉立 부용당상부용입

人芙蓉勝花芙蓉 인부용승화부용

정자 위 부용이 서서 부용꽃 바라보니
부용꽃보다 부용이 더 어여쁘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꽃이 먼저 지나보다


일만 시조역


아깝게도 부용이 황진이, 계랑. 매창 등과 같이 유명한 기녀 시인이면서도 우리에게 생소한 사람이었던 것은 그와 함께 한 김이양 등이 시조를 멀리하고 산 분들이어서 뛰어난 문재를 갖고도 시조 한 수를 남기지 못한 까닭니다.

오늘 산행은 비록 북한산자락에는 들지 못해 대신 광덕산(廣德山 699m)이란 야트막한 산에 들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산행이었다.

 

2006년 12월 22일

 

강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