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재(成三嶺)~만복대(萬福臺)~정령치(鄭嶺峙)~고리봉~고기삼거리~주촌리~수정봉(水晶峰)~여원치(女院峙) (백두대간 제 32구간)
산행일자 : 2006년 11월 05일
산행장소 : 성삼재~작은고리봉~묘봉치~만복대~정령치~고리봉~고기삼거리~주촌리~노치샘~수정봉~입방치~여원치
산행모임 : 대전한겨레산악회 (46명)
산행날씨 : 안개가 많고 흐리다가 비와 우박이 내리린 후 갬 (안개로 가시거리는 10m)
산행시간 : 8시간 22분 (선두는 2시간이상 먼저도착)
산행거리 : 20,60km
지리산(智異山 1,915m)!
오늘 산행은 지리산 종주는 아니지만 성삼재에서 만복대에 오른 후 여원치로 하산하는 코스로, 날씨만 허락한다면 지리산 종주에서 볼 수 있는 풍광 못지 않은 좋은 풍광을 조망하며 산행할 수 있는 코스이다.
덕유휴게소에서 찰밥으로 아침을 먹고 지리산기슭에 대간호가 들어서니 간간이 햇빛이 비추며 붉게 물든 가을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해발 5~600m지점을 지날 때만 해도 거센 바람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이리 저리 몰고 다니며 장난을 치더니 해발 1,000m 조망이 좋은 조망지를 지날 때부터는 낮게 깔린 구름과 안개가 지리산의 멋진 봉우리와 능선을 집어 삼키더니 이내 대간호까지 삼켜버리고 사위(四圍)를 온통 어둠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오늘은 혹시나 지리산의 진면목을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다.
"빨지산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대 있다", 옛 시인의 집" 등의 시집을 낸 이원규 지리산시인의 "등산(登山)과 입산(入山)" 이란 시를 읽으며 마음을 비워 본다....
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등산과 입산"
산그늘에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울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기 바랍다.
다만 등산은 말고 입산하러 오시길.
등산은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경쟁하듯이 종주를 하다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앞 사람의 발뒤꿈치 뿐이지요.
하지만 입산의 마음으로 계곡을 타고 흔적 없이 오르는 사람에게는 몸 속에 이미 지리산이 들어와 있습니다.
유정 무정의 뭇 생명들이 곧 나의 거울이자 뿌리가 되는 것이지요.
누구나 정복해야 할 것은 마음 속 욕망의 화산이지 몸 밖의 산이 아닙니다.
산에 오를 때엔 바람의 방향을 따라 흥얼거리며 '만만디'('천천히'의 중국어) 오르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사람도 살고 산짐승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람결에 나의 냄새와 노래를 실어 보내면 멧돼지나 반달곰이나 독사들도 알아서 길을 내주지요.
처음엔 향기로운 풀꽃을 따라 갔다가 상선약수의 계곡 물을 따라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 그대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08시 39분 성삼재(成三 1,070m)
안개와 구름속을 굽이굽이 돌던 대간호는 어느덧 성삼재에 정박하고 회원님들을 하선 시킨다.
지난 8월 20일 새벽 3시 비내리는 성삼재와 오늘 성삼재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만큼 사위는 급히 옮겨다니는 구름과 안개로 인해 10여미터 앞을 분간하기 힙들다.
그래도 주차장 한 켠에 모두 모여 최영장군님이 주도하는 산행전 준비운동에 열심히 따른 후 배낭을 둘러매고 성삼재에서 만복대로 향하는 들머리를 찾아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춘다.
성삼(成三)재는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한)시대 진한과 마한이 전쟁을 버리던중 마한 군대의 공격에 밀리던 진한의 왕이 지리산의 깊은 계곡인 달중계곡으로 숨어 왕궁을 세우고 피난생활을 하면서, 북쪽 능선에 여덜 명의 장수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여 "팔량치",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여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므로 성이 각각 다른 세 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하게 하여 성삼(成三)재라 부르게 되었다.
08시 43분 첫번째 헬기장
성삼재 들머리에서 만복대 5.3km라 씌어져 있는 푯말을 뒤로하고 5분여를 걸으니 안개에 쌓인 첫번째 헬기장에 닿는다.
이곳에서 회장님과 선두그룹 그리고 부회장님을 먼저 보내고 후미일행을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있으려니 후미일행중 제일 먼저 똘이장군님이 헬기장에 발을 내딛는다.
09시 13분 두번째 헬기장
지리산 10경중 제2경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반야봉(1733.5m)을 조망할 수 있다는 작은고리봉(1,248m)을 아무 말 없이 넘어서니 두번째 헬기장이 나온다.
가시거리가 10m를 채 벗어나지 않아 반야봉은 물론이고 종석대(1,366m), 북동쪽의 삼봉산(1,187m)등을 조망할 수 없어 아쉬움만 남기고 다시 묘봉치(1,108m)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09시 43분 묘봉치 (1,108m)
작은고리봉(1,248m)에서 작은 봉우리를 대 여섯개 넘어서니 세번째헬기장이 있는 묘봉치(1,108m)가 나온다.
묘봉치는 억새가 가득하여 헬기장의 흔적은 거의 없어져 버리고 또한 묘봉치를 알리는 푯말이나 이정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이 묘봉치에서는 좌측으로는 산수유마을로 유명한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의 상위,하위마을로 이어진다.
모처럼 힘내자님과 익산의 만보기아저씨를 모시고 묘봉치에서의 흔적을 남겨 본다. 위 사진에서 힘내자님만 보이고 서병모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서병모님은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10시 16분 안개속에서의 알바
묘봉치를 지나 30여분 가량 발품을 파니 만복대(萬福臺 1,433.4m)가 가까워지는지 대간능선은 그 높이를 점점 높여간다. 높이가 한층 높아지는 산행로를 따라 한 봉우리를 오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한 산행객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 산행객에게 똘이장군님이 한겨레에서 오셨는지 물으니 맞느다고 대답하고는 이내 우리를 지나쳐간다.
분명히 우리일행 뒤를 따르는 회원님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산행을 했는데, 뒤에서 한 회원님이 우리를 지나쳐 간다...??? 필시 그 회원님은 "알바"를 한 것이다.
조망이 없는 안개속을 걸으며 그동안 산행하다가 알바한 경험담을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 받고 즐겁게 웃으며 발길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회장님을 비롯해서 5명의 회원님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니 회장님 역시 알바를 한 것이다. 오늘처럼 가시거리가 10여미터 밖에 안 되는 날은 갈림길이나 봉우리의 정수리 부근에서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대간마루금을 벗어나 엉뚱한 마루금을 밟기 마련이다.
"똘이장군님은 몇 분 전부터 자신의 뒤에서 거친 숨소리와 인기척이 들렸는데 아마 다른 산악회의 선두라고 생각하고 길을 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걸어왔단다. 뒤 따르던 회장님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ㅎㅎㅎ"
위 사진은 대간호가 성삼재에 오르기 전 부터 멀미에 시달리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고생하는 최현경님님을 한겨레의 구조대장이신 최영장군님이 안개속에서 응급처치를 해주는 모습니다.
10시 24분 만복대를 향하여
만복대 1km라 씌어져 있는 푯말과 안개속 이지만 멋진 바위가 윤각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는 봉우리를 비켜 지나가는 지점부터는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고 무개가 무겁게 느껴지는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내 안개가 안개비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인데 최영장군님은 멋진 바위가 있는 능선을 따라 알바한다며 그 곳으로 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산행을 하며 회원님들은 짙은 안개로 인해 아름다운 풍광들을 조망 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을 하곤 했었는데.....
10시 35분 만복대(萬福臺 1,433.4m)
거센 바람이 만복대로 이어지는 산행로 주변에 넓게 분포되 있는 억새들을 이리 저리 뒤흔들며 묘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가파른 산행로를 따라 힘든 발품을 판 결과 만복대(萬福臺)에 선다.
만복대는(萬福臺)는 노고단(老姑壇 1,507m), 반야봉(盤若峰 1,732m)과 함께 지리산 국립공원의 서부를 구성하며, 소백산맥 중 고산을 이루는 산이며,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 전체가 부드러운 구릉으로 되어 있어 산 높이에 비해 산세가 부드러운 편이며, 고리봉(1,304.5m)까지 3km에 이르는 남능선에는 지리산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억새 군락지가 있어 주변의 정경과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곳이다.
정상에서는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1,915m) 등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북쪽에 있는 정령치(1,172m)와 남쪽에 있는 성삼재(1,090m) 고개에는 도로가 나 있어, 두 고갯마루를 잇는 당일 산행을 할 수 있다.
섬진강의 지류인 서시천(西施川)이 만복대의 서사면에서 발원한다. 인근 구례군의 산동면(山洞面)에 있는 온천관광지와 연계한 등반지로서 찾는 이들이 많다.
거센바람과 안개비가 내리는 만복대 정수리에서는 오래 머물 수 없어 간담하게 기념촬영을 하고 청령치로 내려설 생각에 기념촬영을 해 보았으나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10시 57분 암릉 위의 소나무를 지나며
만복대(1.433.4m)에서 조금 내려서니 주천면과 산동면의 경게를 이루며 요강바위를 지나 다름재로 능선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는 부분에는 암릉과 함께 멋진 조망바위가 곳곳에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안개비가 내리는 탓에 전망바위에 올라도 하얗게 파도가 일렁이며 펼쳐지는 안개 바다만이 눈에 들어올 뿐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조망바위 앞의 소나무가 안개속에서 신비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힘내자님이 나누워 주신 귤과 아몬드를 먹으며 만복대에서 강한 비바람 때문에 하지 못했던 다리쉼을 해 본다.
다리쉼을 하고 정령치로 향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까지만 해도 안개비만 조금 내리는 상황이라 우의(雨衣)를 입지 않았으나 지금 내리기 시작한 비는 금반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우리 일행은 가던길을 멈추고 저마다 배낭에서 우의나 판초(poncho)를 꺼내어 입는다.
우의를 입고 배낭을 다시 매고 발길을 옮기려고 하니 산행로 앞쪽에서 심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내 5~6명의 산행객들이 나타나더니 그 들도 오던길을 잠시 멈추고 굵어지는 빗방울에 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의를 입고 길을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던 빗방울은 우박(雨雹)으로 변해 땅에 쏟아지며며 갈길 바쁜 내 마음을 더욱 심난하게 한다.
"지금 내리는 우박은 아마도 미쳐 가을걷이를 못 한 농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할 것인데..."
11시 33분 정령치(鄭嶺峙 1,172m)
산불감시 초소가 안개속에서 비와 우박을 맞으며 높게 서 있는 봉우리에 올라 잠시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몰라 갈팡 질팡하다가 한겨레산악회의 대간시그널을 발견하고 미끄럽고 가파른 내리막 비탈을 조심 조심 한 차례 내려서니 정령치(1,172m)가 나오는데 정령치대피소는 두터운 안개와 내리는 비에 감쌓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령치 주차장에는 대간호가 정박하여 좋지 않는 날씨에 산행하다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우리는 대간호 선장님에게 우리가 마지막 이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출발하라고 하니 선장님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그럼 수고들 해유~~"라고 말하며 우리를 배웅한다.
친구 이석춘님은 이 곳에서 막걸리 한 사발 먹고 가야한다며 농담을 건넨다.
서산대사(西山大師0의 황령암기(黃嶺岩記0에 의하면 정령치(1,172m)는 기원전 84년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城)을 쌓고 지키게하였다는데서 지명(地名)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신라시대 화랑이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고도 하여 산정(山頂)에는 옛날의 역사를 실증이라도 하듯 지금도 군데 군데 유적이 남아잇어 당시를 상기케 한다.
산 밑을 내려다 보면 발 아래보일 듯 말듯 굽어 보이는 절경(節景)은 장엄하기 그지없고 안개가 낀날이는 선경이 연상되어 신선(神仙)이 된 느낌을 주는 곳이다.
11시 57분 고리봉(1,304.5m)
고리봉(1,304.5m)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雲峰邑) 주천면(朱川面) 산내면(山內面)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북동쪽으로는 세걸산(世傑山 1,222m)을 지나 바래봉(1,165m)과 덕두산(1,149.9m)으로, 남서쪽으로는 1시간 전에 지나온 만복대(萬福臺 1,433.4m)를 마주보고 있다.
산의 정상에는 고리가 있는데, 아득한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를 이루어 배를 대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곳에서 대간이 분기되는 대간분기봉이다.
정령치(1,172m)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산행로는 가파른 계단과 암릉이 번갈아 잇따르는데, 오마막 비탈의 중간 중간에는 조망이 좋은 조망바위가 여러곳에 분포되 있다. 그러나 오늘은 조망바위에 올라도 그 어떤 풍광도 조망할 수 없다.
정령치에서 한차례 계단으로 된 비탈을 올라 떡갈나뭇잎이 수북이 쌓여있는 구간을 지날 때 힘내자님과 최현경님이 이 곳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를 청하니 최영장군님도 동의하는 눈치다.
나는 그 의견에 반하여 고리봉 정수리에 올라 점심을 먹어야 한다고 다그친 후 잰걸음으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암장으로 향한다.
두터운 안개와 비에 감쌓여 정수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리봉의 정수리로 향하는 발걸음은 좀처럼 속력이 붙지 않고 무겁기만 한 가운데 가쁜숨을 몰아쉬며 고리봉정수리에 오르니 산불감시초소로 보이는 한평 남짓한 가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고리봉 정수리에서 힘내자님과 최현경님이 올라 오기를 기다리며 최영장군님이 따끈한 아욱국을 준비하는사이 8명의 일행이 모두 고리봉에 모여 찬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가건물 안에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오늘 점심메뉴의 특선은 머니 머니해도 최영장군님이 끓여 주신 아욱국과 이석춘님의 배추속 그리고 내가 준비한 부침개 였다. 물론 식사 후 후식으로 마신 궁중차의 맛은 나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만들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행히 내리던 비는 사그러들고 바람도 잦아들어서 고리봉 푯말에 모여 기념촬영을 한 후 고기삼거리로 향한다.
12시 56분 고기삼거리 2.5km
고리봉(1,304.5m)에서 고기삼거리 2.5km라 쯰어져 있는 푯말 까지는 가파른 내리막 비탈에 너널위로 굴참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어 미끄럽기 짝이 없다. 또한 굴참나뭇잎은 빗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 더욱 미끄럽다.
앞서 가시는 익산의 만보기아저씨는 산행로가 미끄러우니 조심하여 발길을 옮기라며 거듭 당부의 말씀을 하며 조심해서 내리막 비탈을 내려간다. 그런 만보기아저씨의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덧 내 뒤를 따르는 분들과는 제법 거리가 벌어져서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3시 11분 일본잇갈나무숲(落葉松)
가파른 너덜비탈과 떡갈나무가 다 하는 지점부터는 한동안 일본잇갈나무(落葉松)숲이 군락을 이루며 산행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지점을 걸을 때는 마치 푹신푹신한 스펀지 위를 걷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13시 40분 멋진 소나무
일본잇갈나무가 자취를 감추고 키가 무척 큰 소나무숲을 따르다 13시 34분에 고기삼거리 0.5km라 씌어져 있는 푯말을 지나 낮은 봉우리를 넘어서니 둘레가 세 아름은 족히 되 보이는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대간마루를 가로막고 있다.
멋들어진 소나무를 뒤로하고 5분여를 더 내려서니 산내면에서 정령치(1,172m)를 넘어 주천면 고기리의 고기삼거리를 지나는 737번 도로가 눈에 들어오는 고기삼거리가 나온다.
13시 45분 고기삼거리(500m???)
고기삼거리에 내려서니 청령치에서 처럼 대간호가 정박해 있고 대간호 선장님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나는 먼저 고기삼거리 주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조금 있으니 후미그룹이 모두 도착하여 60번 도로가 호경리로 갈라져 나가는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특별히 대간호 선장님도 함께 모기고 기념촬영을 해본다.
아래 사진은 늘 한겨레 회원님들을 위해 안전운항하시는 대간호 선장님과 대간호의 모습이다.
대간호 선장님은 정령치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리 이 곳에 정박하여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안전사고나 환자 발생에 대비하고 있었다.
기념촹영 후 선장님에게 우리가 마지막이니 이제 여원재로 출발하라고 하니 선장님은 "추존마을까지 태워 줄 터이니 타세유~" 라고 농담을 던지시고는 이내 대간호에 올라 여원치를 향해 출항하신다.
14시 05분 주천면 주촌마을 을 지나며
고기삼거리에서 노치마을로 향하는 길에 고리봉을 등지고 사진에 담아보았으나 검은 먹장구름이 아직 고리봉에서 만복대로 이어지는 능선에 걸려있어 고리봉정수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사진은 노치마을로 향하는 삼거리에 위치한 보건소 화단 너머로 노치마을과 수정봉(804.7m)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담아 보았다.
고기마을에서 노치마을로 향하는 포장도로 가장자리의 논에는 이미 수확을 끝낸 벼의 그루터기에 연두빛의 새싹이 움트고 있으며, 밭에는 배추와 무우가 잘 자라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 종아리보다 굵게 잘 자란 밭의 무우가 무청은 온데간데 없이 싹둑잘려나간 상태로 밭에서 널브러져 있어 올해 김장배추와 무우값이 형편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고리봉에서 고기삼거리로 하산 할 때 부터 잦아들기 시작한 비는 농촌의 들녘을 지나 노치마을로 향할 때는 하늘에서 햇빛이 간간이 내 머리위로 내려쬐고 있다.
주촌마을이나 노치마을을 지날 때 여느 농촌의 풍경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이 주변을 평범한 농촌마을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곳은 해발 600m는 넘지 않으나 500m가 넘어 각종 고랭지 채소들을 많이 경작하고 있는 고랭지(高冷地)에 속하는 곳이다.
14시 18분 노치샘(550m)
노치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을 지나 동네 구판장에서 김장을 담그기 위해 배추를 절이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똘이장군이 제치를 발휘해 맛있는 배추속을 얻어 먹고 돌아서니 이 근동에서는 물 맛이 으뜸이라는 "노치샘"이 나온다.
노치샘 물맛 좀 보려고 샘 가장자리에 놓여져 이는 플라스틱 종지를 들고 샘물을 한 종지 떠 올리려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 수 잆었다. 근동에서 물맛이 으뜸이라 전해지는 샘에은 개구리가 헤엄치며 노닐고 샘의 가장자리는 물때와 이끼가 잔뜩 껴 있고 심지어는 쓰레기까지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노치샘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2003년, 환경부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중심으로 핵심지역과 완충지역을 포괄하는 "백두대간보호에 관한법률"을 제정하였고, 2005년 1월 시행하였다. 이 곳 노치마을 역시 백두대간 핵심지역에 해당되지만, 대대손손 이어온 경작지의 사유재산권 보호 명목으로 보호지역에서 제외되었다.
환경부의 "백두대간훼손지역조사연구 II"에 따르면, 백두대간 핵심지역의 훼손 유형 중 경작지로 인한 훼손 면적은 23.5㎢로 전체 훼손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백두대간 마룻금의 최대 사유재산권인 경작지가 사실은 최대 규모의 백두대간 훼손 유형인 셈이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백두대간 보호와 생태계 연결성을 위해 노치마을의 농업방식을 유기농 경작으로 전환하고 토지를 매수, 복원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마을의 당산제 등 문화적 요소와 마을의 전통을 활용하여 문화마을로 육성해보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인 주민의 강제 이주나 반대로 사유재산권 보장은 백두대간과 노치마을 주민의 공생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14시 21분 노치마을의 당산나무(堂山木).노거수(老巨樹)
노치샘을 떠나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휘돌아 노치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수정봉(804.7m) 산기슭에 도착하니 수령이 200년은 넘고 그 둘레가 다섯 아름은 되 보이는 멋들어진 소나무 여섯 그루가 반겨준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 주는 나무 즉 당산나무(堂山木)나 노거수(老巨樹)로는 느티나무나 회나무 그리고 버드나무 등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인데 노치마을 처럼 소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시고 있는 마을은 흔치 않는 일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를 유별나게 좋아하고 귀하게 여겨왔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로 조상들은 이를 집을 지을 때 재목으로 이용했으며, 재목을 쓰고 난 부스러기는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소나무숲에서만 자생하는는 송이를 귀하게 여겼고 송진으로는 밤을 밝게 밝히는 등잔에 넣어 사용했다. 또한 소나무 뿌리에서 채취할 수 있는 백봉령으로는 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당산나무 밑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며 과일을 나누어 먹은 후 수정봉으로 오르기 위해 발길을 옮기는데 첫 번째 봉우리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비탈길은 나에게 비싼 발품을 요구한다.
그래도 산행하는 산행로에는 수 십년은 되 보이는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잘 자라고 있어 솔향에 흠뻑 취해 힘든 줄도 모르고 산행할 수 있는 구간이다.
노치마을에서 소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시고 있는 이유를 소나무고목과 20~30년은 되 보이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대간마루금을 따라 수정봉을 오르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5시 08분 고인돌.돌멘(dolmen).탱석(撑石).지삭묘(支石墓)
당산나무에서 솔향기에 취해 40여분을 걷다보면 짧은 암릉이 있는 구간을 지나는데 그 곳에서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들을 만날 수 있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 고인돌에 대한 자료를 옮겨본다.
지석묘(支石墓)는 한국 선사시대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포관계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에서는 산둥 반도와 랴오닝 지역의 남부 저장 성 부근에서 가끔 보이며,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들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基)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주변의 자연지세에 걸맞는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강 옆의 들판이나 바닷가 부근에 있는 것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수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평안·황해·전라지역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고인돌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된다. 기능면에서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어떤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고인돌'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무덤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무덤고인돌이다. 무덤고인돌의 형식을 보면, 먼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인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며, 덮개돌 밑에 있는 무덤방의 짜임새는 만든 방법과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탁자식고인돌(북방식·전형)은 4개의 판판한 돌을 세워서 지표 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덮개돌의 하중을 받고 있는 긴 벽은 그대로 있지만, 고인돌을 만든 다음 나들이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 짧은 벽은 거의 파괴되어 없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황해·평안도의 서북지역에 많이 있고 전라남도 나주, 경상남도 거창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바둑판고인돌(남방식·기반식)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땅 속에 있는 무덤방은 구덩이·돌널·돌덧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구덩식고인돌(무지석식·개석식)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하며, 전북 고창지방에 있는 것은 덮개돌이 무려 170t 가량 된다.
15시 24분 수정봉(水晶峰 804.7m)
당산나무가 있는 산기슭에서 우리네 조상들이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에 솔 가지를 걸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소나무로 만든 관과 함께 땅에 묻히기를 원했 듯 유별나게 좋아했던 소나무숲속으로 나 있는 대간마루금을 따라 1시간 가량 발품을 팔면 수정봉(水晶峰 804.7m)이 나온다.
수정봉의 정수리에는 빗돌이나 푯말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어는 산악회에서 종이에 써서 코팅한 이정표가 나뭇가지에 메달려 바람에 날리고 있다.
아래사진은 수정봉 정수리에서 지나온 대간능선을 돌아본 사진이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노치마을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대간능선이며, 멀리 보이는 능선과 하늘이 만나 만들어 낸 하늘금은 고리봉(1,304.5m)에서 만복대(1,433.4m)이어지는 능선인데 아직도 먹장구름이 걷히지 않아 정확한 하늘금을 가늠 하기는 힘들다.
15시 51분 입방치()
수정봉(804.7m)에서 여원치를 향해 발길을 옮겨 15시 39분에 헬기장을 지나 간벌작업이 한창이라 어수선한 마루금을 따라 내리막 비탈을 20여분 내려서니 입방치가 나온다.
아래 사진은 입방치를 조금 지나 15시 56분에 우리가 올라야 할 무명봉의 암장을 조망하며 카메라에 담은 사진이다.
16시 09분 첫번째 무명봉
입방치에서 20여분동안 가파른 비탈의 크고 작은 암릉을 따라 힘든 발품을 파니 암장이 곳곳에 막혀있는 멋진 무명봉 정수리에 닿는다.
첫번째 무명봉 정수리에는 두 갈래길이 있는데 우측으로 나 있는 산행로는 운봉읍 준향마을로 향하는 길이니 주의하여 좌측으로 나 있는 대간마루금을 따라야 한다.
16시 21분 조망바위에서
입방치에서 첫번째 암봉을 넘어서니 산행로 좌측으로 멋진 풍광이 펼쳐지고 그 풍광을 조망 할 수 있는 멋진 조망바위가 나온다.
위 사진은 좌측의 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흘러내리는 대간능선을 이백면 과립마을 쪽에서 조망한 사진이다.
16시 31분 성터
입방치를 지나 첫 번째 봉우리와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는 산행로 곳곳에는 예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곳이 예전에는 성을 쌓고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곳 임을 말해 주고 있다.
아래 사진은 두 번째 봉우리를 넘어 다음 산행에서 올라야 하는 고남산(高南山 846.4m)을 조망하며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16시 41분 주지봉의 마애불
고남산(高南山 846.4m)이 보이는 지점을 지나 여원치(470m)로 가다보면 대간 마루금에서 좌측으로 벗어나 흘러내리는 능선의 끝에 커다란 암장이 눈에 들어온다. 남원시 이백면 양가마을 뒷 산 주지봉에 있는 불상으로 고려시대에 양각된 마애불이다.
여원치를 향하다 좌측으로 흘러내린 주지봉 암장의 낭떠러지에 양각된 마애불은 높이가 230cm, 어깨 너비는 120cm에 달하며, 1998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여원치에서 주지봉 마애불로 향하는 산행로는 제법 넒은 임도로 대간마루금을 넘나들며 주지봉으로 향한다.
17시 01분 여원치(女院峙 477m) 운성대장군(雲城大將軍)
여원재(女院峙)의 유래는 고려말 왜구가 바다를 건너 이 곳 운봉현까지 침입이 극심하던 때 고갯마루에는 주막집이 있어 왜구들이 주막집을 들락거리다 주모위 몸으 ㄹ만지며 손찌검을 했다. 주모는 왜구의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날카로운 칼로 왜구의 손을 탄 한 쪽 젓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했다.
한편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운봉현에 도착한 이성계는 꿈에 백발의 노파로부터 왜구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날과 전략을 계시받아 꿈에서 이른대로 싸운결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이성계는 꿈에 나타난 노파가 왜구의 손찌검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자결한 주모의 원혼(冤魂)이라 믿고 이 고갯마루 암벽에 여상을 암각한 다음 주모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 여원(女院)이라 불렀디는데서 여원치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여원치(女院峙)는 남원과 운봉 그리고 함양 즉 호남과 영남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이러한 여원치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오늘 산행의 날머리에서 운성대장군(雲城大將軍)이 반긴다. 그리고 24번 도로를 넘어서니 버스정류장 옆에 대간호가 정박해 있고 여러회원님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나는 먼저 대간호 뒤로 보이는 임도를 따라 최대한 고남산(高南山 846.4m)에 가까이 다가가 그 모습을 담아본다.
아래 사진의 고남산은 2주 후, 11월 19일에 2차 대간종주의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산행을 하는 산 이기에 그 모습을 담는 것이다.
오늘 산행에서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반야봉(1733.5m)의 모습니나 억새가 일렁이며 만들어 내는 만복대(萬福臺 1,433.4m)의 억새 물결은 감상하지 못했으나 수정봉에서 여원치로 하산하며 좋은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산행 후 마신 한 잔의 하산주에 힘내자님께서 마련해 오신 머릿고기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힘내자님 감사합니다.*^^*"
2차 백두대간 마지막 산행(고남산)에서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11월 13일
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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