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기

갈령~비재~봉황산~화령재~윤지미산~신의터재 (백두대간 21구간)

작은岳馬 2006. 4. 18. 11:26

 

 

갈령~비재~봉황산~화령재~윤지미산~신의터재 (백두대간 21구간)

 

산행일자 : 2006년 04월 16일

 

산행장소 : 갈령~비재~봉황산~화령재~윤지미산~신의터재

 

산행모임 : 대전 한겨레 산악회

 

산행날씨 : 맑음(강한바람)

 

새벽에 일어나 배낭을 매고 용문네거리에서 20여분을 기다리니 회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간호가 10여분 늦여진다는 연락이었다. 용문네거리의 다섯명 회원들은 대간호가 늦는 일은 당연하다는 듯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 표정들 이었다. 대간호는 20여분이 늦은 시각에 도착해 우리를 태우고 시민회관에 정차 했는데, 이번에는 한 회원이 늦잠을 자는 이유로 대간호는 시민회관에서 다시 10여분을 더 기다린 후 출발했다. 원두막에서 마지막으로 회원들을 태우고 갈령을 향해 대간호는 항해를 시작했다.

 

"약속은 서로가 지킬때 아름답고 편리한 것인데..."

 

옥천을 지나 구읍에서 보은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는 벗꽃이 활짝펴서 장관을 이루었다. 이 곳 도로의 양쪽 가로수는 벗나무다.

대간호안의 회원들은 너나 없이 차창밖에서 펼쳐지는 벗꽃길의 향연을 보고 감탄사를 자아내며,서로 벗꽃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30여분전에 불쾌했던 감정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06시 37분 구병산 휴게소

 

구병산 휴게소에 도착하니 멋진 느티나무와 앙증맞은 인형상들이 대간호를 반가이 맞이해 주는 듯 했다. 대간호에서 내려서니 날씨가 제법 쌀쌀한 관계로 아침은 대간호 안에서 먹기로 했다. 아침으로 김밥을 먹는 회원님들이 목이 매일까 걱정이 되서 육수를 나누어 주는데 육수가 따듯하지 않아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을 먹고 나는 잠시 시간을 내어 지난번 산행후 이곳 휴계소의 전경을  사진에 담지 못했던 사실을 만회하려고 구병산휴계소의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구병산은 휴계소 뒤의 신축건물과 전신주에 가려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다.

 


 

07시 08분 갈령

 

갈령에 도착해 대간호에서 내려서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 속리산 구간 산행후 이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기역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중, 나는 사정이 있어 이곳이 처음인 진아씨를 갈령 표지석에 세워놓고 기념 촬영을 한 후 들머리를 찾아 갈령 삼거리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번 산행때는 길을 잘 못들어 능선을 타고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니 이곳이 처음인 것 처럼 낮선 느낌이 든다. "능선을 타고 내려온 길이 헐씬 더 볼거리도 많고 멋있었다..."

제법 가파른 오름을 힘들게 오르는데 봄을 알리는 보춘화 중 하나인 진달래가 방긋 웃으며 제법 가파른 오름을 힘들게 오르는 산행객들의 입가에 오히려 웃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중 송곡님의 웃는 모습이 진달레와 아주 잘 어울렸다.

 

진달래를 다른 이름으로는 두견화(杜鵑花)라고 하며 진달래가 붉은빛을 띄는 데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옛날 중국 촉나라의 임금 망제는 이름이 두우였다. 위나라에 망한 후 그는 도망하여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이 맺힌 두견새는 밤이고 낮이고 "귀촉, 귀촉(고향'촉'으로 돌아가고 싶다)"하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새를 귀촉도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죽은 망제의 혼인 두견새는 그 맺힌 한으로 하여 피를 토하며 울고 토한 피를 다시 삼켜 목을 적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한이 맺힌 피가 땅에 떨어져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꽃이 붉어진다는 애달픈 전설이 설인 꽃이 바로 두견화다.***

 

"두견새는 봄에 오는 철새로서 이로운 새인데 두견새의 특징은 숲속에서 홀로 살며 둥지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알은 휘파람새 등의 둥지에 한 개씩 낳아 놓음으로써 다른 새가 대신 새끼를 기르게 하며 자신은 조금도 자기의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 무슨 사정이 있어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래서인지 두견새의 울음은 듣는 이에 따라서는 처절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진다."

 


 


 


 

07시 32분암릉(갈령~갈령삼거리)

 

갈령 삼거리로 오르는 길, 한 암릉에 오르니 지난 속리산 구간 산행때는그렇게 보고 싶어도 안개비로 그 모습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던 속리산맥이 천황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웅장하고 장엄한 암봉과 능선을 그림같이 펼처 놓고 한 눈에 보여준다.

그 웅장한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 앉히고 잠시 속리산맥의 능선을 가슴에 새기고 속리산 능선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카메라를 꺼내 사진에 몇장 담았다.

또한 뒤 따라 오는 지양씨에게 문장대와 천황봉 능선을 보라며 불러 세워 놓고 자랑을 했다.

속리산을 사진에 담고 갈령삼거리를 향해 조금 더 오르니 이번에는 형제봉이 나를 보며 자기들도 사진에 담아 달라며 웃고 있는 듯 했다.

이곳에서는 형제봉(929m)과 바로옆 829.3m의 무명봉이 나란히 보인다.

두 봉우리를 보니 형제봉이란 이름이 왜 붙여졌는지 알것 같다.

 


 


 

07시 44분 갈령삼거리

 

갈령에서 갈령삼거리 까지 오르는 구간은 제법 가파른 오름과 암릉이 이어지는 쉽지 않은 구간임에도 가파른 오름을 오른 후에 암릉에 오르면 속리산 능선을 볼 수 있는 조망권으로 인해, 그리 힘들다는 생각 없이 오르는 구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산행때 지나온 갈령 삼거리지만 오늘은 새롭게 느껴진다. 오늘 산행은 갈령에서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산행은 이곳 갈령삼거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고 마음 먹고 비재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긴다.

 


 

08시 11분 첫 번째 헬기장

 

갈령에서 이곳 헬기장까지의 구간은 처음에는 완만한 내림길이 있고, 이후로는 아기자기한 암릉과 아주 재미있는 구간이 군데군데 숨어 있는 구간이었다.

암릉은 여느산의 암릉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재미있는 구간이라 함은 내가 속리산 능선을 사진에 담으려고 지채하는 동안 나를 앞서 지나간 회원들을 따라 잡으려고 똘이장군을 비롯해 손중호님, 힘내자님을 지나 뛰다시피 하여 작은 암릉과 제법 높은 암봉을 지나 못재(천지)?에 다달았을 떄의 일이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힘내자님과 손중호님이 내 앞에서 걷고 있는게 아닌가...?

나는 어떻게 나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니 내가 지나온 암릉과 암봉을 우회해서 왔다는 대답이었다. 또한 똘이장군은 벌써 앞서 갔다는 것이다.

나는 대간길을 이탈했으니 다음에 와서 땜빵해야 한다고 농담을 한 후에 못재(못재에는 대간길 우측에 옛날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음 직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에서 다시 힘내자님과 손중호 님을 추월하여 이번에는 제법 가파른 오름을 잰 걸음으로 올라 첫 번째 헬기장에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헬기장에서는 지양씨를 비롯해 3명의 여자분들이 이영미씨가 나눠준 오이를 먹으며 작은해프닝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영미씨가 배낭이 너무 무겁다며 물을 버리려 하자, 두 여자 분들은 물은 버리면 않된다고 나누어 마시며 나에게도 물과 오이를 나눠 주는게 아니가... 나는 오이를 하나 얻어 먹고 앞서서 걷고있을 똘이장군 일행을 따라 잡으려고 이내 배낭을 매고 뛰다시피 해서 헬기장을 벗어났다.

 


 


 


 

08시 25분 첫 번째 헬기장~500m무명봉

 

마치 꽈배기 처럼 이상하게 자란 소나무를 지나 전망이 좋은 암릉에 오르니 좌측으로 두리봉(873m)과 대궐터산(746.3m)으로 보이는 산이 있고, 그 산기슭에는 고즈녁히 자리잡은 동관리 마을이 눈에 잘 들어와 사진에 담고, 다시 걸음을 제촉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08시 35분 무명봉(500m)

 

20여분을 잰 걸음으로 걸으니 앞 서가던 똘이장군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최영장군님은 나를 보더니 이곳으로 오면서 바위위에 있는 소나무를 봤야고 물어봤다. 내가 보지 못 했다고 하니, 여러명이 그 것도 못 봤야고 옆에서 거들며 나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앞선 일행을 따라 잡으려고 열심히 걷다보니 주위를 살필 경황이 없었던 것 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일행들을 진달레꽃 앞에다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나 역시도 최돈민씨가 한장 찍어 주었다.

계속해서 똘이장군 일행을 따라 나서려 하니 똘이장군이 하는말 "우리와 같이가면 뒤에오는 여자분들 한테 혼난요"라고 하며 이곳에서 기다리다 여자 분들과 같이 오라고 했다.

 

10여분을 기다리니 후미 일행들이 모두 함께 도착했다. 나는 먼저 지양씨를 비롯해 4명의 미녀들을 진달레꽃 앞에다 앉혀놓고 꽃이 예쁜지 미녀들이 예쁜지 실험을 했다...ㅎㅎㅎ

또한 이길숙님이 나를 부르기에 그 곳으로 가 보니 멋진 소나무와 고사목 그리고 진달레가 어우러져 있는 곳에서 이길숙님이 포즈를 취하고 있어, 이길숙님을 시작으로 서병모님, 손중호님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을 찍다보면 참 좋은 일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어른들도 내가 시키는데로 모두 따라 한다는 점이다."

 


 


 


 


 


 


 


 

08시 47분 무명봉(510m 비재前)

 

이 곳에 올라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니 그 곳을 지날때는 보지 못한 암릉과 암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작은 속리산 능선을 보는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비재까지는 30여분에 걸처 급내림으로 이어진다.

 


 


 


 

09시 10분 비재(320m)

 

비재는 날으는 새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 이다.

그러나 지금 비재의 모습에는 어디를 살펴봐도 날으는 새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화령재(7.5km), 형제봉(4.2km)라고 씌어진 푯말만이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철재계단에 매달려 이 곳이 비재임을 말해 주는 듯 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곳의 시설물들은 자연과 잘 어울리고 보기도 좋은 친환경적인 재료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도 이곳 비재에서 앞 서가던 사람들과 뒤 따르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쁜일이 있어, 나는 이미 봉황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일행들 까지 모두 불러 철재계단에 앉혀놓고 이곳을 우리가 지났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11명 모두를 사진에 담았다.

비재에서 봉황산 까지는 오름의 연속이라 일행들은 마음을 다잡고 봉황산을 향해 일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09시 29분 부명봉(459,9m 비재後)

 

비재에서 갑자기 시작한 오름은 230m를 가파르게 진행한 20여분 후에야 완만한 능선길에 접어 들었다.

쉬지않고 230m를 오른 후 힘내자님과 지양씨가 힘든 몸을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이곳 무명봉에서 간식을 나누어 먹고 조금 걸으니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 두 그루, 아니 세 그루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한 그루의 나무는 송진을 잔뜩 머금은 마디를 여러게 달고 있었서 이상하게 생겼으며, 다른 두 그루의 나무는 위 쪽은 정상적으로 자란 나무인데, 뿌리 쪽에서는 한 그루의 나무로 합처져 큰 옹이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 옹이에는 냉면 그릇 만한 작은 연못(나무가 썩어 생긴 옹이에 비가와서 물이 있는상태)이 있었으며, 그 곳에 두견화(진달래)가 떠 있는 모습은 마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선녀탕을 떠올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구간에 한가지 더 이상한 점은 산행길은 따라 리본이 쭉 늘여저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손중호님에게 물어보니 송이 버섯을 채취하기 위해 이 주변 마을 사람들이 쳐 놓은 것이란다. 매년 입찰을 통해 낙찰자가 그 산 주변의 버섯 채취권을 갖는다는 설명까지 자세히 해 주셨다.

 


 


 


*** 원추리 ***

 

이상하게 생긴 나무들을 지나니 이번에는 보춘화 들이 나의 눈 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의 야생화를 사진에 담았는데,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원추리 : 백합과(百合科 Lili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

고구마처럼 굵어지는 덩이줄기가 뿌리 끝에 달린다. 긴 선형의 잎은 2줄로 마주보게 겹쳐서 나는데 잎끝은 뒤를 향해 둥글게 젖혀진다. 노란색의 꽃은 7월경 잎 사이에서 길게 나온 꽃대 끝에 6~8송이가 피는데, 하루가 지나면 시든다. 꽃의 길이는 10㎝ 정도이고 꽃부리[花冠]는 6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술은 6개, 암술은 1개이다. 봄철에 어린순을 나물로 먹으며, 봄가을에 덩이뿌리를 캐서 말린 것을 훤초(萱草)라고 하여 한방에서 황달이나 이뇨의 치료 및 평사제나 강장제로 쓴다. 또한 민간에서는 뿌리 한 웅큼과 생간의 즙(汁)을 내어 변비 치료에 쓴다. 여름에 노랗게 피는 꽃을 보기 위해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 생강나무꽃 ***

 

생강나무꽃 : 생강나무꽃도 이른봄에 산에서 피어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보춘화중 하나이다. 생강나무는 나무를 꺽으면 거기서 난는 냄새가 생강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수유처럼 국내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인데, 꽃이 대롱처럼 길게 모여피는 산수유와는 달리 매우 짧게 모여핀다. 멀리서 보면 산수유와 흡사하지만, 여백미가 일품인 꽃이다.

꽃은 2~4월까지 피고, 매화나무 동백나무로도 불리며 씨앗은 기름을 짜서 등잔 기름으로 스였고, 잎과 과육은 약재로도 쓰인다.

 


*** 노란제비꽃 ***

 

노란제비꽃 : 봄이 시작될 무렵 들판과 산골짝 능선 도처에 부리지어 수놓듯이 피어나는 식물이 제비꽃 종류이다.

제비꽃은 모양새를 따라 고깔제비꽃, 잔털제비꽃..., 최초발견 지명을 따라 남산제비꽃, 태백제비꽃, 금강제비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제비꽃이 보라색, 흰색이지만 ‘노랑제비꽃’은 꽃의 색으로 인해 그 이름을 얻었다. 노랑제비꽃은 제비꽃 종류 중 가장 높은 지역에서 자생하는 고산식물로 4월 1000 미터 내외 높이의 어느 산길에서나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민들레가 필 무렵인 봄이 시작되는 계룡산의 일부 주능선에서도 반갑게 눈맞춤 할 수 있다.    

 


 


 


 

10시 47분 봉황산(740.8m)

 

봉황산 정상에 올라 주변 산들과 마을들을 살펴보니, 봉황산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봉황이 날개를 접으며 내려 앉은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었다. 우측으로는 상용리를 좌측으로는 상현리를 양 날개에 품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중 머리와 몸통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봉황산이니, 산이름에 걸맞는 산세를 하고 있었다. 봉황은 길조이니 이산 봉황산도 길한 산이라 생각되어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며, 봉황의 모습을 친구 내외와 함께 사진에 담아본다.

비재에서 이곳 봉황산 까지 오르는 길은 5~6개의 봉우리를 넘나들며 오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힘든 구간이었으며, 마지막에 이어지는 작은 암벽과 암릉은 특별하지 않은 여러 봉우리들을 1시간 20여분 동안 힘들게 오른 산행객들에게 봉황산을 오르는 재미를 만끽하게 하는 제미있는 구간이다.

 


 


 


 

10시 55분 전망바위(봉황산~산불감시탑)

 

봉황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조금 내려서니 전망이 좋은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 오르니 좌측으로는 대궐터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의 8부능선에 위치한 극락정사란 절도 눈에 뛰는데, 너무 멀어서 사진에는 잘 잡히지 않는게 아쉬웠다...

또 우측으로는 상현리라는 마을이 봉황의 한쪽 날개 품속에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어 참 보기 좋고 살기 좋은 동네라고 느끼게 하였다.

 


 

 

 


 

 11시 19분 산불감시탑

 

봉황산에서 화령재를 향해 반쯤 내려오니 산불감시탑이 나왔다.

봉황산을 오를때 부터 시장기가 돈다며 식사를 하고 가자고 하는 여자분들을 달래며, 화령재 까지는 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던 내 눈에 무릅이 아픈지 다리를 절면서 급 내림을 힘들게 내려가는 정진씨의 모습이 들어온게 산불감시탑을 앞에 두고서 부터였다.

나는 친구에게 저 감시탑에서 식사를 하면 어떻겠야고 농담을 하는 순간 감시탑에서 한 어르신이 창문을 열고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나느 얼른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친구의 얼굴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또 친구에게 어르신이 하루종일 저 안에만 있으려면 심심하겠다고 말을 던지며, 조금 내려가 적당한 자리가 있으면 점심식사를 하고 가자고 제안했다.

 

11시 25분 우측으로 틀어지는 삼거리

 

몇분을 더 내려서니 제법 넓은 자리가 있어 우리는 그 삼거리에서 아주 맛있는 점심을 즐겼다. 삼거리 우측으로는 산행객들이 길을 잘 못들까봐 한 나무 가지에 20~30개는 넘어 보이는 띠지가 매달려 있었다.

20여분간의 식사를 마치고 과일로 후식까지 먹고, 배낭을 챙기기 시작할 무렵 후미 그룹인 힘내자님 일행이 도착해서 나는 식사는 하셨는지 물어보니 모두들 봉황산에서 식사를 헀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준비해온 감귤을 꺼내어 한개씩 나누어 먹었다.

"진아씨는 무릅이 너무 아프다며 진통재까지 먹어야만 했다..."

잠시후 우리는 진아씨를 앞에 세우고 화령재를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12시 27분 화령재(입구)

 

화령재에 거의 다달으니 똘이장군 일행이 잘 가꾸어진 묘지에서 막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중 이었다. 우리를 발견한 똘이장군이 멋쩍어서 하는 말 "기다리다 기다기다 안와서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었어..."

최영장군님은 다리를 절며 내려오는 진아씨를 보더니 안타까운지 위로해 주었다. 나역시 안타까운 마음은 누구 못지 않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화령재 입구에는 민가가 여러채 있었고, 백두대간 산행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뛰었다. 대간길에서 잘 포장된 도로를 걷는 마음은 비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씁쓸하기만 한 가운데, 보리밭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보리밭이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게 우리네의 생활 형편이 좋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보리밭이 강한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를 연상하게 했다.

그 보리밭 옆으로 걸어오는 김의환님, 서병모님 어라! 손중호님이 서병모님의 뒤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세분의 모습이 옛날 전국 팔도를 유람하시며 시조를 읖조리던 "김삿갓"님을 떠 올리게 하여 기분이 좋았다.

 

왜 산에 오르는가?

 

산을 내려가 다시 오르려고 산에 오른다................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가라"고 독일의 어떤시인은 노래했다.

인생이 허무해지면 산으로 가는것이 좋다.
배낭을메고 고즈녁한 산길을 홀로 걷다 보면
생활속의 잡념과 지난 새월의 허무함은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생활에 지치고  삶의 의미를 잃었을때 산에 오르는 것이 좋다.
온몸에 땀을 흘리며 산 정상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다 보면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느끼며  삶의 건강성을 다시 찿을 수 있다.

왜 산에 오르는가?

산이 거기있고 우리를 부르기 때문이다.

산은 사계절 표정을 바꾸며 우리에게 정다운 손 짓을 한다.

 

봄의 산은 연한 초록빛의 옷을 갈아입고 수줍은 처녀처럼 우리를 부른다.

여름의 산은 초록빛의 풍성한 옷차림으로 힘있게 우리를 유혹한다.
가을의 산은 오색빛 단풍 옷으로 갈아잎고 화사하게 우리를 가을의 풍성한 만찬장으로 초대한다.

겨울의 산은 순백한 하얀빛의 옷차림으로 깨끗하게 단장하고 

우리에게 해맑은 미소를 던진다.

 

산에 오를때는 귀 귀울려 산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골짜기를 타고 능선을 향해 힘있게 오르는 바람 소리.

그 바람 소리에 응답해 서로 속삭이는 높고 낮은 나무들의 소리.

아침 일찍부터 소리없이 내려와 대지를 감싸주는 운해의 무언의 소리.

골짜기를 타고 서로 빨리 내려가려고 웅성대는 물 소리.

산행하는이들이 지루할까 염려되어 뒤 따르며 말을 걸어주는 새들의 소리.

 

왜 산에 오르는가?

 

모든 것을 벗으려 산에 오른다.

욕심,욕망,돈,명예,잘나고 못난것

 이 모든 것이 산에서는 한 줌의 흙과 한 모금의 물보다 못한 것을.

모든 것을 비우고 산에 순응하며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과 하나됨을 느낄때,

산에 오르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왜 산에 오르는가?

 

산을 내려가 다시 오르려고 산에 오른다................

 

일구생각

 

 

이정표에 의하면 이곳 화령재에서 신의터재 까지는 도상거리 11.3km, 3시간 20분을 더 걸어야 오늘 산행이 끝난다. 그런데, 평지인데도 진아씨는 여전히 다리를 절며 앞서 걷고있다. " 저 상태로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련지 걱정이 앞선다..." 그 아픔을 나 역시 지난 산행때까지 격었기에 내 걱정은 더 했다.

 


 


 


 

12시 35분 화령재(320m)

 

이곳은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화령재는 경북 상주와 충북 보은, 괴산을 연결해 주는 고개다.

화령재에는 화령재를 알리는 표석과 팔각정자가 아주 멋지게 단장되어 있었다.

나는 화령재의 전경을 사진에 담기위해 열심히 뛰어 표석과 팔각정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앞서서 윤지미산을 향해 들머리로 올라서는 일행들을 따라 나섰다.

 

화령재에서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우측으로는 과수원과 밭이 펼처져 있고, 좌측으로는 고속도로 교량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 보였다.

 


*** 할미꽃 ***

 

화령재에서 작은 봉우리를 지나 윤지미산을 향해 가는 길 에는  할미꽃과 제비꽃이 여기 저기에 피어나 산행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할미꽃 : 할미꽃은 꽃모양이 마치 할머니의  굽은 등처럼 피어나며, 암술대의 모양도 할머니의 하얀 머리털 같아서 할미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할미꽃의 뿌리를 한방에서는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하며 건위, 소염, 수렴, 지사, 지혈, 진통제로 써왔다. 민간에서는 학질과 신경통에도 사용하기도 했단다.

 

할미꽃에는 가슴아픈 절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옛날에 할머니가 두 손녀를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큰 손녀는 얼굴은 예뻤지만 마음가 무척 나쁜데 비해 작은 손녀는 얼굴은 비록 못 생겼지만 마음씨만은 고왔단다. 

얼마 뒤 두 손녀는 혼기가 차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큰 손녀는 이웃에 사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고 작은 손녀는 가난한 산지기에게 시집을 갔다. 늙은 할머니는 거동조차 힘들게 되자 부잣집으로 시집간 큰 손녀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는데, 큰 손녀는 자기를 길러준 은혜를 잊고 할머니를 구박하고 멸시하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큰 손녀의 집에 더 이상 있지 못 하고 작은 손녀를 찾아가다가 그만 길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할머니가 걱정되어 마중을 나온 작은 손녀는 할머니의 주검을 발견하고는 슬프게 울면서 양지 바른 야산에 할머니를 정성을 다해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할머니의 무덤가에는 허리가 꼬부라진 꽃이 백발을 달고서 피어났단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할미꽃이라고 불렀단다.

 


*** 제비꽃 ***

 

할미꽃을 감상하고 조금더 가니 자주색 꽃잎으로 예쁘게 차려입음 제비꽃이 수즙게 피어 있다.

 

제비꽃 : 제비꽃은 제비꽃과에 곳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원 줄기는 없고, 잎이 지면에 모여 뿌리에 직접 달려있다. 꽃의 색은 짙은 자주색으로 3월부터 5월까지 핀어난다.

제비꽃은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야생화 중 하나로 이름도 다양하다. 반지꽃, 자화지정, 근근채, 병아리꽃, 오랑캐꽃, 외나물꽃, 씨름꽃, 장수꽃 이라고도 부르는데, 반지꽃이란 이름은 어릴 때 여자애들이 제비꽃으로 반지를 만든데서 유래된 듯 하다. 그 중 자화지정이란 이름은 한의학에서 제비꽃을 한약재명으로 부르는 용어다.

제비꽃의 전초를 말린 자화지정은 청열해독의 효능이 뛰어나 종기를 비롯한 각종 염증을 치료 하는데 자주 쓰인다. 그러나 자화지정은 그 성질이 차서 허약한 사람에게 쓰면 안되며, 지금은 소염 진통재로 인하여 그 쓰임새가 많이 줄었단다.

 

또 윤지미산으로 향하는 낮은 능선 길에는 진달레가 길 양쪽으로 만발했고, 고사리가 이곳저곳에서 가랑잎과 솔잎사이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고사리를 이길숙님은 열심히 채취해서 작은 봉지에 담았는데, 조금만 시간을 더 가지고 고사리를 채취하면 금새 그 봉지에 가득 찰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산행 시작부터 몸상택가 좋지 않던 서병모님이 뒤로 쳐지는 이상한 일도 벌어지는 구간 이었다. "서병모님은 아마도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뒤 쳐저서 걷고 있을 것이다."

 


 


 


 

13시 38분 윤지미산(538m)

 

상주시 화서면에 위치한 "윤지미산" 이름이 참 특이한 산이다.

산 정상은 제법 넓은 곳이었다. 그러나 잡목들이 많아 전망이 좋지 않아서 옆으로 조금 나아가니 내가 지나온 봉황산과 화령재가 어렴프시 나마 보인다.

윤지미산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름이 30여분이나 이어지는 힘든 구간이었다. 진아씨가 다리를 절며 제일 앞에서 한발한발 천천히 오르는 데도 힘내자님이나, 이길숙님이 따라오르지 못하고 뒤 쳐지게 만들 만큼 숨이차고 힘들게 30여분을 올라야 정상표석(표석이라고 볼 수도 없이 초라한 표석이지만...)을 볼 수 있는 급 오름이었다.

그래도 나는 회원들을 표석에 세우고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물과 간식으로 윤지미산을 오르느라 소비한 칼로리를 보충하는 사이 진아씨는 자꾸만 뒤쳐지는 자신이 다른 회원분들에게 미안했는지 벌써 산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급 내림이라서 더욱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내려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나도 서둘러 진아씨의  뒤를 따라 걸은지 10여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후미를 보고 있는 손중호님에게 잡히는 일이 2시간 여동안 반복해서 일어났다.

후미를 보고 있는 손중호님이 우리를 추월하지 않고 뒤쳐저 걷다가 합류하고 하는 일을 반복한 것은 나와 진아씨를 배려해서 그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았다... " 손중호님을 비롯해 힘내자님, 지양씨, 이길숙님 그리고 친구 석춘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글 로나마 표현합니다.*^^*"

그래도 윤지미산을 내려오며 나무 사이로 우측에서 보이던 판곡저수지는 좋은 볼거리였다. 다른 산행때 같으면 조망이 좋은 곳을 찾아 사진에 담았을 텐데 오늘은 그럴 사정이 아니라서 아쉬웠다...

 


 

14시 21분 무명봉(410m)

 

이 곳은 좌측으로 어산리의 무지개산(437.8m)이 연결되는 삼거리로, 지도 상으로는 삼각형의 꼭지점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 봉우리르 오르는 길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산행객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신의터재 까지는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니 1시간40분정도 걸리다고 했다. 나는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진아씨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에 물어본 건데, 내 생각보다 40분이나 더 걸린다는 말에 진아씨는 잠시 주춤거리는 모습이 뒤에서 걷고있는 나에게도 역역히 나타났다...

 


 

15시 19분 무명봉(390m~380m사이)

 

무명봉(410m)에서 물과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사이 이번에도 진아씨가 먼저 길을 나서기에 나역시 뒤를 따라 길을 걷다가 아주 넓은(200여평은 족히 되 보이는)바위가 좌측으로 나타나서 사진에 담았지만 사진으로는 그 바위의 크기가 잘 실감나지 않는다.

그 바위를 지나며 나는 뒤를 여러번 돌아 보았다. 손중호님이 우리를 배려해서 바로 뒤 따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16시 18분 동백꽃

 

380m의 무명봉에서 1시간여를 더 걸으니 또다시 손중호님이 우리와 합류했다.

그래서 여러명이 한 무리를 지며 낮은 봉우리를 내려 오는데, 후손들이 동백꽃으로 잘 가꾸어 놓은 묘지가 있었다. 그 묘지를 지나 조금더 걸어 낮은 봉우리를 하나 더 넘으니 이번에는 자동차 까지 세워져 있는 논과 밭이 나왔다. 밭 가장자리에는 달래가 치천으로 자라고 있어 이길숙님과 힘내자님이 나물을 캐가고 싶어서 어쩔줄 몰라 하는사이, 손중호님이 점잖게 하는말, "그 달래 다 세서 못 먹어..."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 밭두렁을 지나 10여분 더 걸으니 우측으로 도로가 보이고 마을이 이곳 저곳에 보이는 봉우리에 올랐는데, 그 봉우리의 한나무에 329.6m봉이라 쓰여진 푯말이 붙여저 있어 지도를 찾아보니 신의터재가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시 42분 신의터재(280m) 

 

드디어 신의터재다. 신의터재를 알리는 여러개의 표석과 대간호가 눈 앞에 보인다...

대간호를 보고 진아씨가 나에게 하는말 "나 오늘 열번이나 울었었요..."

 

신의터재가 있는 이곳 화동땅 평산리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조상하고 명복을 비는 글로 대개 사율로 되어 있었다는 어만각이라는 누각이 있단다.

조선 개국공신 신유정 선생이 죽자 세종임금이 직접 만사를 지어서 하사하신 것을 귀중하게 보관해둔 누각을 말한다.
또 판곡1리에는 김준신 의사가 상주진에서 항전 분투하여 왜적을 대파하고 32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는데, 왜적은 패전한 보복으로 김준신의 고향에 살고 있는 가족을 살생하기 위하여 절곡마을(현재 판곡1리)을 기습하니 이 소식을 들은 김준신의 문중 사람들은 왜병에게 살육되느니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 하여 이 마을에 있는 못에 부녀자들이 몸을 던졌으니 후에 이 못을 낙화담이라 부르고 당시의 의열(義烈)을 추모하였다 전한다.
또한 김준신의사의 충절을 그린 제단비가 낙화담에서 서북쪽으로 함께 위치하고 있단다.

 

아무리 급해도 이런 이야기가 서려있는 신의터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나는 오늘 산행하는 동안 나와 진아씨를 배려해주고 도와주신 분들을 신의터재 표석에 세우고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그후 대간호로 이동하니 회장님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우리를 반가히 맞이해 주며 직접 컵라면에 물을 부어주는 일도 서슴치 않으셨다..

 

"이번 산행은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산행이었지만, 나는 그 어떤 산행때 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기역들을 가슴에 담고서 다음 산행을 기약하며 대간호에 올랐다..."

 

" 먼저 도착해 대간호에서 기다리시던 회원님들 정말 고맙고 죄송합니다..."   

 

 

2006년 04월 20일

 

강일구

 

 

첨부 : 각시붓꽃

 


 

붓꽃과(Iridaceae) 식물입니다.

● 학명 Iris rossii Baker
중에서 속명인 Iris는 희랍어로 '무지개'를 의미했지만 후에 식물이름으로만 쓰이게 되었습니다.

각시붓꽃은 전국의 숲 속 그늘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붓꽃(I. sanguinea Hornem.)에 비해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습니다. 다 자라면 약 30cm 정도 됩니다. 잎도 붓꽃에 비해 가늘고 짧지만, 매우 맵시있는 모양새라고 생각합니다. 봄부터 초여름 무렵까지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꽃줄기가 짧아서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가 될까 말까 합니다.

● 왜 각시붓꽃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누구라도 일단 보고 나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길에 잠시 앉아 쉴 때, 곁에 각시붓꽃이 있으면 한결 기분이 좋아집니다. 소박하지만 단아하고 세련된 모습 때문인지 사람들이 분재용으로 많이 캐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있어야할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각시붓꽃은 숲 속 고향과 사람이 사는 집 안방 중 어느 곳을 더 좋아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