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제1구간 유령산[楡嶺山 932.4m, 우보산(牛甫山)]
산행일자 2007년 03월 04일
산행장소 : 피재~1,145m봉 낙정맥 분기점~작은피재~대박등~서미촌재~유령산~느릅령~900m봉~통리
산행모임 : 대전한겨레산악회(44명)
산행날씨: 흐리고 비
산행거리및 시간 : 8.3km, 03시간 39분
백두대간 2차 종주를 마친 기념으로 2006년 11월 19일 매요리(梅要里)에서 기념행사를 치른 후 개구리가 꽃피는 봄을 기다리며 겨울잠을 자듯 겨우내 명산 산행만을 하다가 대동강 물도 녹아 흐른다는 경칩(驚蟄)을 이틀 남겨둔 지금 낙동정맥(洛東正脈) 종주(縱走)를 위해 새벽 01시에 일어나 배낭을 꾸리려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백두산에서부터 남으로 뻗어내려 지리산까지 내려가는 백두대간이 강원도 태백의 북쪽 매봉산(천의봉天儀奉 1,303m)에서 분기하여 한반도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서쪽으로 거대한 낙동강을 만들고 동쪽으로 동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부산의 낙동강 하구인 몰운대(다대포)에서 그 맥을 가라앉히는 도상거리 352Km(약 463km)를 힘차게 뻗어 내린 산줄기이다.
이 구간은 백두대간 못지 않은 표고 1,000m의 고산들과 명산들이 계속 이어지며 남한의 마지막 남은 오지 지역으로 겹겹이 산을 두르고 첩첩산중이 많아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산군을 끼고 있고 맹호(猛虎) 모양의 한반도 지형의 척추를 형성하고 있어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합한 것이 진짜 대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제에 의하여 왜곡(歪曲)되고 폄하(貶下)된 우리나라 땅의 산줄기를 밟으며 그 속에 숨어 있는 혼과 얼을 느껴며 지명과 봉우리의 옳바른 이름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고, 이제는 낙동정맥을 22구간으로 나눠 2007년 03월 04일부터 동년 12월 16일까지 완주한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첫 산행을 나서는 지금 내 부푼 가슴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02시 50분 용문네거리에서 친구 내외와 만나 정맥호에 승선하여 회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정맥호는 시민회관과 원두막을 경유하며 44명의 회원님들을 승선시키고 낙동정맥종주의 출발점인 피재를 향해 순항을 한다.
한참을 순항하던 정맥호는 07시 15분에 유일사 휴게소에 아침을 먹기 위해 잠시 정박한다.
대보름에 걸맞게 찹쌀과 쌀, 보리, 콩, 조, 기장 등이 골고루 들어 있는오곡밥으로 아침을 먹고있는데 하늘에서는 무심하게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며 내 마음을 아푸게 한다.
07시 38분 유일사휴게소를 출항한 정맥호는 한두 방울씩 떨어니는 빗속을 가르며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피재로 힘차게 나아간다.
08시 01분 피재,삼수령(三水嶺915m)
하늘에서는 한두 방울씩 빗방울리 떨어지고 짙게 깔린 안개가 감싸고 있는 피재의 모습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가운데, 장맥호에서 하선한 회원님들은 저마다 배낭에서 우의와 판초를 꺼내 입으며 분주히 피재를 오가고 있다.
피재는 황지 2동과 적각동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로 천의봉 동북편에 있다. 해발 915m 정도 되는데 35번 국도가 지나가며 포장이 되어 있다. 옛날부터 황지지역이 '이상향' 이라 하여 시절이 어수선하면 삼척 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 고개를 넘어 왔기에 피난(避亂) 온 고개라는 뜻이며 피해오는 고개라는 뜻이다. 또한 피재를 피산장등(彼山長嶝, 一云彼嵬長嶝)이라고도 하는데 피안(彼岸 : 이상향, 고통이 없는 理想境)으로 가는 큰 산등이란 뜻이다. 직치(稷峙)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피재를 한자표기로 하는 과정에서 피직(稷)자를 쓴 것이다. 70여년 전 봇짐장수와 등짐장수(褓負商)들이 세운 산령각(山靈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피재(915m)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한강, 낙동강, 오십천으로 나뉘는 곳이라 하여 '"삼수령"(三水嶺)이라 부른다. 즉, 낙동강과 한강, 오십천의 물길을 가르고 있으니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피재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한강이,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동쪽으로는 오십천의 물길이 되어 이 땅의 곳곳을 적셔준다.
한편 이 부근은 산골 중의 산골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쌀 한톨 심을 평지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해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만한 땅이 못 된다”고 기록된 땅이다.
피재(삼수령 915m)에는 삼강(낙동강,한강,오십천)이 발원하는 삼수령"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무엇보다도 남한땅 백두대간에서 정맥이 최초로 분기되는 기점으로 낙동정맥이 갈라져 부산 몰운대까지 장장 359km가 이어진다. 또한, 지각산(地角山 1,080m)으로 이어지는 들머리로 들어서면 넓따란 주차장이 있고, 삼수정이란 육각정자와 "빗물의 운명"이란 글귀가 씌어진 조형탑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命으로
빗물 한가족이 大地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三水嶺만이 전해주고 있다.
나는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곧장 산에 들려하는 회원들을 잠시 삼수령(三水嶺 915m) 조형물 앞에 모시고 기념촬영을 한 후 오늘의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 들머리로 향한다. 들머리는 조형물 맞은편의 임도를 따라 일 백여미터를 오르면 좌측에 있다.
아래의 사진은 코크리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르다가 길 가장자리의 나뭇가지 끝에 이슬(안개 혹은 빗방울)이 흠뻑 맺혀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담으며 나는 산행하는 동안 봄을 알리는 보춘화(報春花)를 만나기를 기대했으나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08시 35분 낙동정맥 분기점
피재에서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르는데, 겨우내 수북이 쌓여있던 눈이 채 녹지 않아 미끄럽기 짝이 없는 비탈을 오르며 잠시 다리품을 파니 이내 낙동정맥 분기점을 알리는 푯말이 나온다.
푯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으려니 '힘내자'님 아니! '가을하늘'님이 미끄러운 산행로를 오르느라 힘이 들었는지 혹시 아이젠( Eisen)을 가지고 있는 회원중 사용하지 않는 분이 없는지 물어온다. 평소 아이젠을 즐기지 않는 내가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가을하늘님에게 건네니 가을하늘님은 서병모님과 한 족씩 나누어 착용한다.
낙동정맥 분기점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후 낙동정맥 종주의 첫발을 내딛으니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며 흥분되기 사작한다.
08시 48분 농장
낙동정맥 분기점에서 가랑잎과 겨우내 내린 눈이 수북이 쌓인 산행로를 따라 10여분 동안 내려서니 자욱하게 깔려있는 안개 사이로 농장건물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목초지로 보이는 농장은 철책으로 둘러쳐저 있고 건물 앞에는 임도로 보이는 길이 나있는 반면 정맥길을 알리는 시그널이나 표지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짙게 깔린 안개로 인해 20여미터 밖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낙동정맥 마루금을 찾을 수 없어, 이용우 산악대장님과 선두의 여러회원님들은 임도를 따라 내려가기로 하고 임도를 따르는데 시그널이나 표지판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정맥 마루금을 알리는 시그널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어 대안으로 35번 국도를 향해 농장 비탈을 내려 서는데 35번 국도와 농장사이에는 사유지 경계를 표시하는 철책이 겹겹이 둘러쳐저 있어 그 철책을 따라 한참 동안을 우회한 후에야 우리는 35번 국도에 닿을 수 있었다.
08시 59분 농장 비탈을 내려서고 있는 선두의 회원님들
09시 18분 작은피재
35번 국도에서 작은피재를 찾아 5분여에 걸쳐 지도와 콤파스(compass 나침반)를 놓고 독도한 결과 피재(917m)와 전약촌의 수자원공사 중간 지점에 작은피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 사진은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이 많이 자라고 있는 작은피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09시 42분 대박등(930.8m)
작은피재에서 임도와 목초지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을 지나 가랑잎이 수북이 쌓인 밑으로 곳곳에 빙판이 숨어 있는 오르막 비탈을 조심해서 올라서니 '크고 밝은 언덕'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대박등(930.8m)이 나온다.
대박등 정수리에는 푯말이나 빗돌은 없고 다만 정수리를 알리는 삼각점 만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도착한 부대장님은 삼각점 위에서 고도개와 지도를 꺼내놓고 봉우리의 높이를 측정하고 있었다.
오늘 처럼 시계(視界)가 좋지 않아 가시거리가 20여미터 밖에 되지 않은 날에는 주변 봉우리의 높이나 뻣어나간 능선의 모습을 가늠할 수 없어 위치를 파악하는데 여가 어려운게 아니다.
대박등에서는 다리쉼을 하지 않고 바로 서미촌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10시 16분 서미촌재(예낭골)
삼각점이 있는 대박등(930.8m)에서 배두대간의 중화지구를 연상케하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40여분동안 924m봉과 910m봉을 넘나들며 다리품을 파니 옛 왕능 같은 커다란 봉분을 가진 무덤이 나타난다. 그 무덤의 빗돌은 이상하게 옆으로 돌아앉아 있고 그 빗돌에는 안동권씨와 정부인 삼척김씨의 묘라고 씌어져 있다.
무덤을 뒤로 하고 비교적 가파른 내리막 비탈을 한차례 내려서니 채석장 혹은 도로 개설현장으로 보이는 곳이 나오는데 정맥의 허리를 절개하여 흉물스럽게 자연을 훼손한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공사 현장에는 얼마 전까지도 굉음을 내며 작업을 했을 굴삭기와 채석기가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내며 을씨년스런 풍경을 자아낸다.
이곳에서 서쪽사면의 기슭이 예낭골인데 그 곳에는 지금도 채광을 하는 탄광이 있다고 한다.
흉물스런 공사현장을 벗어나 미끄러운 비탈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한차례 다리품을 파니 산행로 가장자리 곳곳에 참호가 눈에 들어오는 922m봉이 나온다.
평소 시계가 좋으면 산행객들은 922m봉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에 빠져서 산행객들의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는 곳인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인해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할 수 없음이 끝내 아쉬운 순간이다.
10시 49분 유령산[楡嶺山 932.4m, 우보산(牛甫山)]
922m봉을 지나니 이내 하늘은 찌를듯이 솟아 있는 마천루(摩天樓)나 그 높이가 312m나 된다는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케 하는 송전탑이 안개속에서 우뚝 솟아 있다. 송전탑을 지나 다리품을 조금 더 파니 932.4m봉에 오르게 되는데, 이 봉우리가 바로 우보산(牛甫山 932.4m)인 것이다. 우보산은 유령산(楡嶺山)이라고도 하는데 '楡'자는 느릅나무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봉우리 아래 고개이름이 느릅재(楡嶺)인 것도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보산 정수리에서 가파른 내리막 비탈을 따라 10여분 동안 내려서면 '유령산영당(楡嶺山靈堂)'이 나온다. 그 영당의 비문에는 "신라 때 임금이 태백산 천제를 올리기 위해 소를 몰고 넘던 고개이며 조선시대에는 태백산을 향하여 망제를 올리던 곳으로 우보산(牛甫山)이라 하였다" 고 씌어져 있다.
유령산 정수리에는 '낙동정맥 유령산(932.4m)'라 씌여진 나즈막한 빗돌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빗돌 받침에는 '태백시 주목산우회 2006년 9월'이라 씌어져 있어 빗돌을 세운 시기를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먼저 정수리 빗돌을 카메라에 담고 유령산 정수리에 모인 20여명의 회원님들을 모시그 기념촬영을 해 본다. 사진에서 보듯 많은 회원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함께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11시 01분 느릅재(楡嶺) 유령산영당(楡嶺山靈堂)
유령산(楡嶺山 932.4m) 정수리에서 급한 내리막 비탈을 한차례 내려서면 느릅령이 나오는데 느릅재는 산행하는 산행객들이 야영을 많이하고 야영지에 꼭 있어야할 식수는 느릅재에서 동서쪽으로 100m만 더 내려가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샘이 있어 그 곳에서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고 한다.
11시 13분 솔이끼및 집채바위
가파른 비탈을 힘겹게 오르는데 앞서 가던 선두 일행이 집채만한 바위 기슭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며 과일을 나누워 먹고 있다. 평소 같으면 가파른 오르막 비탈을 올라서서 점심식사를 할 것이었으나 오늘 산행은 비교적 짧은 산행이라 모든 회원님들이 통리로 하산한 후에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지금 이 시간에 간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과일을 나눠 먹는다는 이유로 피로를 느끼는 다리를 쉬게 하자는 마음도 깔려있다고 하겠다.
위 사진은 맛있는 과일을 먹고 집채만한 바위를 휘감으며 오르다가 바위면에 자라고 있는 '솔이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쏠이끼(Polytrichum commune)
솔이끼과의 선태식물로 한국, 중국 동북부, 일본, 사할린섬 등의 아시아와 유럽, 북아메리카등지에 분포하며 산지의 습지와 점토질 토양 바위위에 서식한다.
소나무 줄기에 솔잎이 달려 있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광합성으로 양분을 얻는다. 줄기는 높이 5∼20cm, 때로는 30cm까지 곧게 자라며 짙은 녹색이다.
뿌리·줄기·잎은 구별할 수는 있지만 뚜렷하지는 않으며, 뿌리는 가는 실 모양의 흰 뿌리를 가지고 있다. 가지가 없고 마른 잎은 꼬이지 않으며 줄기에 붙어 있다. 잎은 길이 6∼7mm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암수딴그루이다. 암그루는 줄기 끝에 포자낭이 달려 있고, 수그루는 줄기 끝에 잎만 있다. 다래자루는 붉은빛을 띤 갈색이고 다래는 달걀 모양이며 주름이 있다. 물과 양분은 몸 전체에서 흡수한다.
솔이끼속(屬)에는 산솔이끼·솔이끼·큰솔이끼·침솔이끼·고산솔이끼 등이 있다. 한국, 중국 동북부, 일본, 사할린섬 등의 아시아와 유럽, 북아메리카에 분포한다.
11시 19분 윤관석 묘지 망부석
900m봉 정수리 즉 집채바위에 올라 주변 풍광을 조망해 보았으나 짙게 깔린 안개가 사위의 풍광을 모두 삼겨버려 아쉬움을 뒤로하고 갈음을 옮기니 봉우리 왼쪽(동쪽)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온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량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착각했으나 나중에 통리역에 정차해 있는 기관차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900m봉과 910m봉 좌측으로는 영동선이 지나는데 7개의 굴이 연이어 나타나는 심한 갈지(之)자형의 선로와 스위치백(switchback : 가파른 고개 비탈에 정거장을 두기 위한 목적으로 '之' 자형으로 설계한 선로로 오르내리는 경사를 반복적으로 만들어 놓고 아래로 쏠리는 힘을 이용하여 오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선로) 선로가 있는 곳이다. 이 스위치백 선로는 매봉산(1,303.1m) 정수리에서 조망하면 확인할 수 있다.
윤관석의 묘로 보이는 봉분 가장자리에는 키가 50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망부석 두 개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11시 40분 통리마을
900m봉과 910m봉을 차례로 지나면 능선을 따르던 정맥마루금은 좌측으로 꺽어져 심한 내리막 비탈을 만들며 통리를 향해 내려선다.
통리마을의 통리역이 가까워지며 기관차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서고 또한 강원도 탄광촌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통리마을 전경이 안개속에서 아스라이 다가선다.
통리마을 어귀에서 골목길을 굽이굽이 빠져나와 정맥호를 찾아보니 정맥호는 5일에 한번씩 장이 선다는 빈 장터에 정박하고 있다.
먼저 배낭을 정맥호 옆에 벗어놓고 궂은날씨속에 산행하느라 진흙으로 범벅이 된 등산화와 바짓가랑이를 닦으려고 정맥호 선장님이 알려준 주유소로 가 보았으나, 그 곳는 여러 회원님들이 함께 사용하기에는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나는 910m봉 기슭에서 마을어귀 골목을 지나다가 봐 두었던 한 가정집의 수도에서 산행의 피로를 깨끗이 씻을 수 있었다.
12시가 넘어설 무렵 후미 일행들까지 모두 정맥호에 도착하여 맛있는 점심을 먹는데 정월 대보름답게 오곡밥과 산나물들로 차려진 점심상은 일품이었다. 특히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끓여낸 김치찌개와 한잔의 하산주는 그 어느 맛에도 비할 수 없이 맛있었다.
궂은 날씨속에서도 낙동정맥 종주를 위해 모인 모든 회원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첫 산행할 때 가졌던 그 마음으로 오는 12월 낙동정맥을 완주하는 날까지 모든회원님들 몸 건강히 즐거운 산행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2007년 03월 15일
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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