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월악산 르포]

작은岳馬 2006. 1. 19. 08:24
[온천산행 - 월악산 르포] 험산 속에서 자연의 신비감에 빠지다

덕주사~영봉~하봉~보덕암 첫눈 종주산행 후 수안보 온천욕

▲ 영봉 정상 남쪽 아래 마루에서 바라본 월악산 국립공원. 능선들이 눈을 이고 중첩되어 깊은 겨울 분위기를 자아낸다.
“겨울철엔 온천 산행만한 게 없다니까요. 수안보는 그중 최고예요. 보세요, 빙 둘러 산, 산, 산이잖아요.”

첫눈 내린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2월7일 이른 아침 수안보에서 만난 표순남씨(충주산악연맹 이사)와 전용희씨(여?〃 이사)는 충주 산 자랑, 온천 자랑에 열을 올리며, “오늘 오를 월악산(月岳山?1,097m)은 충주의 명산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산”이라 치켜세운다.

지릅재를 넘어 송계계곡을 거쳐 덕주골로 접어드는 사이 산은 올 겨울 첫눈을 맞았는데도 늦가을 잿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을 등진 채 널찍한 터에 들어앉은 덕주사 역시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 매서운 추위에 신도는커녕 보살조차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애불 지나면서 수목화 속으로 들어선 기분

숲길을 따라고 돌계단길을 올라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보물 제406호) 앞에 다다르자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릇 마애불이 넉넉하고 웃음 띤 형상이기 마련이건만 마의태자의 누나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덕주사마애불은 웬지 우울해 보인다. 나라를 잃은 공주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으리라.

▲ 덕주사 아래 영봉 코스 표석.

뒤로 돌아서는 순간 첩첩산중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등 뒤로는 기암절벽이 솟구치고, 골 바깥으로는 수많은 산봉들이 솟아 있다. 푸른 하늘과 숲 짙은 봉우리들, 그리고 은은하게 골을 울리는 딱따구리 나무 쫘대는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이런 산세가 그나마 덕주공주를 조금이나마 달래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예상치 못한 빙판길에 차량 운행시간이 많이 걸려 약속 시간을 못 맞춰 뒤늦게 좇아 올라온 김정자씨(청주 레저토피아)와 합류해 마애불 왼쪽 산길을 오르는 사이 순간순간 탄성이 터져나온다. 산은 숲을 벗어나 바위가 드러나면서 영롱한 빛을 띤다. 정수리에 흰 눈 얹은 산봉은 파란 하늘을 뚫고 날아갈 듯 날카롭고, 바위벼랑마다 반짝였다. 거기에 제 멋대로 몸을 뒤튼 낙락장송이 더해져 더욱 아름답고 자연미가 넘쳤다. 수묵화 화폭 안으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 덕주공주의 애환이 서린 덕주사마애불.

“저 산들 좀 보세요. 전국에 유명하다는 산은 거의 다 다녀봤지만 충주의 작은 산만도 못한 산이 허다하더군요.”

전용희씨의 충주 산 자랑을 들으며 바윗길을 오르는 사이 산은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준다.

“이거 신발이 왜 이렇게 안 빠져-. 산 자랑했더니 아예 붙잡네.”

철계단길을 지나 바윗길에서 바위틈에 발을 끼우고 오르던 표순남씨가 발이 빠지지 않자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발을 이리저리 뒤틀다 결국 등산화를 벗은 다음에야 빼낼 수 있었다. 충주 산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산도 표씨를 그냥 보내는 게 아쉬웠던가 보다.

▲ 마애불에서 바윗길 따라 능선으로 향하는 취재팀. 만수봉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이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 960.4m봉을 향해 오르다 고드름 매달린 굴에 들어선 청주와 충주 산악인.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명목(名木)이다. 거북등 모양의 겉모습을 지닌 아름드리 소나무, 우아하게 가지를 펼친 소나무, 흥이 너무 겨웠던지 허리께부터 나뭇가지까지 이리저리 뒤틀린 소나무 등등, 서로 흉내내지 않은 독특한 모습의 소나무들이 산등성이나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이제 바위 위에 올라선 석상명씨와 김창호씨 마저 낙락장송처럼 보인다.

오를수록 신비경은 더해간다. 암봉은 더욱 웅장해지고, 만수봉에서 포암산을 거쳐 주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양옆 대미산이나 조령산으로 뻗은 백두대간보다 더욱 기운차다. 우리는 지금 대간이 빚어낸 산봉 숲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양지 바른 계단길을 오를 때는 추위가 누그러졌나 싶었는데, 능선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댄다.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한 회색 암벽이 우뚝 솟구쳐 있고, 그 왼쪽에 중봉과 하봉이 동생처럼 다정스럽게 붙어 있다. 그 너머로 짙푸른 명경지수 담긴 충주호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와~, 그림이네요, 그림.”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많은 김창호씨(쎄로또레 홍보담당)는 “이렇게 아름다운 산세는 처음 본다”며 감탄사를 터뜨리고, 표순남씨는 “충주호 주변의 산들은 대개 이 정도 산세는 지니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 낙랑장송을 바라보며 감탄ㅅ느런 표정을 짓는 김창호씨와 석상명씨(오른쪽).

▲ 960.4m봉으로 오르다 바라본 영봉~중봉 능선.


▲ 소나무, 바위, 눈, 사람마저도 나무처럼 느껴진다.
만수봉 갈림목에서 메모하는 사이 앞서간 일행이 송계 삼거리(동창교 2.8km, 영봉 1.5km, 덕주사 3.4km) 부근에 멈춰서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고교 동창인 석상명씨가 재미 삼아 밝힌 20년 가까이 지난 얘기 때문이었다. 고교 동창 세 명과 동창의 아내 친구들과 월악산을 오르던 중 기자는 영봉 아래에서 점심밥을 해놓고 기다리겠노라며 자리를 펼쳤다. 물론 그 몇 해 전 영봉을 올랐기에 빤히 보이지만 꼭대기에 오르려면 진이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창 아내의 친구 또한 얼마 전 오른 적이 있었다며 취사에 동참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그 이듬해 웨딩마치까지 울리게 되었던 것이다.

“악연이라니까요.”

기자가 아무리 악연이라 우겨봐도 오늘 처음 본 충주?청주 산악인들까지도 “그 때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놀려댄다.

 

공포감 느끼게 하는 중봉 하산길

영봉 오름길은 역시 만만찮다. 절벽 뿌리를 껴안고 돌다가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고 올라서야 알바위봉 영봉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쇠난간에 기대는 순간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내리쳤다. 그제야 계단길 내내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리는 수석 위에 서 있었다. 하봉 자락은 충주호로 빠져들고, 만수봉 암릉은 백두대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일행 다섯 명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동시에 폴을 치켜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바람 자고 양지바른 바위턱에 모여 앉아 청주댁, 충주댁의 솜씨와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펼치자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만수봉 바위능선을 가운데 두고 그 양옆으로 펼쳐진 백두대간을 비롯한 충주와 문경, 예천, 단양의 산들은 또한 우리에게는 용궁의 성찬이요 즐거운 눈요깃감이었다. 작은 새들도 우리가 두렵지 않은가 보다. 지지배배 소리내어 응석부리며 함께 점심 먹자 다가온다.

▲ 멋진 조망과 함께 스릴 넘치는 중봉 바윗길. 산자락이 잠긴 충주호가 바라보인다.

“이거 이제 어떻게 내려가지….”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대형 사고’가 터졌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어 산행 시작 전부터 불안케 하던 등산화 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고 만 것. 급한 대로 아이젠을 차고, 끈으로 동여매는 등 할 수 있는 응급처지는 다해보았건만 몇 십m 가지 못해 신발창이 앞으로 밀리곤 하면서 발걸음을 붙잡는다.

▲ 계단길로 이어지는 영봉 등로.

송계 삼거리 갈림목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이다. 올 겨울 첫눈을 밟는다는 생각에 모두들 들뜬 표정이다. 철구조물이 나타난 다음 자연미 넘치는 허리길이 이어진다. 길가의 나무들은 모두 제 멋대로 자라고 있다. 하늘 높이 뻗어오른 거목도 보이고, 힘들었던지 산길쪽으로 몸을 누인 나무도 있다. 중봉 능선길은 그만큼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길이었다.

중봉을 오르는 사이 등 뒤로 솟구친 영봉은 송계 삼거리쪽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영봉 정상으로는 하나의 능선을 이루고 있지만 양옆으로는 한쪽은 수십 길 절벽을 이루고 반대쪽은 짙은 숲이 우거져 산세가 더욱 웅장하게 느껴진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천의 얼굴을 지닌 바위봉이었다.

중봉에 올라서자 허릿길에서 피했던 바람이 몰려온다. 산바람, 아니 얼음 호수에서 올려치는 강바람인 듯 차갑고 매섭다. 하봉 아래 충주호는 주변 산봉들이 감히 다가서지 못할 만큼 냉랭한 분위기다. 반면 숲 짙은 송계계곡 일원은 추위에 떠는 이면 누구든 받아주겠다는 듯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점심을 먹을 때부터 먹구름을 밀려오더니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오후 2시를 조금 넘어선 시각인데도 손가락이 얼어붙는 듯하고, 얼굴이 갈라지는 듯한 강추위가 느껴진다. 강풍에 영봉과 중봉은 소리내어 울부짖었다. 그런 날씨 속에서 중봉을 넘어서는 일이 만만찮다. 바위능선을 따라 와이어로프가 곳곳에 깔려 있지만, 눈 박힌 장갑으로 잡은 와이어로프가 순간순간 밀리면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미끄러지는 순간 수십m 벼랑 아래로 패대기칠 판이다.

▲ 영봉 정상에서 기쁨의 환호를 지르는 취재팀.

▲ 중봉 정상. 송계계곡 일원이 한눈에 바라 보인다.


▲ 시루떡을 쌓아놓은 듯한 기암. 보덕암 위쪽 능선에 있다.
“조심, 조심. 떨어져도 나무가 잡아주지 않는다니까요.”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하다가도 조금만 발이 밀리면 비명소리를 터뜨린다. 그런데도 석상명씨는 “이런 스릴을 어디서 느껴보겠냐”며 즐거워한다. 바윗길을 무사히 빠져나가 발목까지 잠기는 눈밭에 들어서자 모두들 호호, 깔깔대며 해맑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것 또한 겨울 산이 우리들에게 주는 축복이다.

숲길을 빠져나가면서 제 모습을 드러낸 하봉은 중봉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험난해 보인다. 산길이 암봉을 우회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그렇지만, 우회로 첫 구간은 만만치 않다. 수십m 철계단은 거의 수직벽에 걸려 있다. 정면으로 서서는 배낭이 걸려 발을 내딛지 못할 정도다. 철계단을 마주보며 내려서는데도 자칫 미끄러지면 바닥까지 엉덩방아 찧기 십상이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덮칠 듯 위압적이고 웅장한 바위절벽을 끼고 도는 하봉 우회로는 호젓하기 그지없는 허리길이다. 커다란 바위가 군데군데 걸려 있어 위태롭기 그지없고, 오버행 바위는 곧 무너져내릴 기세지만, 바위절벽에 매달린 듯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도 굵고 푸르게 자라는 소나무들을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넉넉해진다.

 

 

충주호 내려다보는 순간 불안감 엄습

하봉 허릿길을 빠져나가자 고즈넉한 산길이 나타난다. 또다시 명목 소나무가 도열한 숲길이다. 산길이 가팔라져도 풍요롭게 우거진 숲은 마음을 편안케 해주고, 아름드리 나무들은 순간순간 기대고 숨을 고를 터를 마련해준다.

▲ 긴장감이 느껴지는 중봉 등로.

오후 4시, 산행을 시작한 지 7시간만에 닿은 보덕암은 깊은 산사였다. 대웅전과 그 아래 마당을 사이에 두고 ‘普德庵’과 ‘普德禪院’이란 현판이 달린 당우 두 채가 마주보고 있는 자그마한 암자건만, 깊고 넉넉한 부처의 기운이 느껴진다. 당우 한쪽 벽에는 장작이 잔뜩 쌓여 있다. 겨울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표순남씨의 손에 이끌려 보덕굴로 향하는 사이 충주호가 내려다보인다. 이제 충주호는 굵은 꽃뱀처럼 산을 휘감고 있다. 순간, 험산을 내려섰건만 아직도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덕주공주도 이런 막막한 산세 때문에 더욱 비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글 한필석 기자 pshan@chosun.com

사진 정정현 차장 rockar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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