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굴목이재에서 만난 나무들…근육질의 서어나무와 미끈한 사람주나무의 조화
▣ 사진 · 글 우종영/ 야생화 사진 작가 · 나무 전문가
남도로 떠나는 열차는 긴 호흡을 감지했음인지 역무원의 손짓 하나로 소리 없이 출발을 한다. 가슴이 설렌다. <게으른
산행>(한겨레신문사 펴냄) 책을 낸 이후로 거의 일년 동안 끈을 놓고 있었으니 오랜만이기도 하거니와, 남녘에 고향을 둔 것도 아니요,
연고도 없음에 그곳은 차창 밖의 풍경과도 같은 곳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선암사·송광사의 길목 역할
순천역에 내리니 남도답게 포근한 기운이 감싼다. 약간의 여유가 있어 역에서 가까운 순천만을 둘러보고 선암사 입구에 도착하니 해는 뉘엿뉘엿하고 사위는 고요하다. 너른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으니 갯벌 위에 오도 가도 못하는 쪽배 같은 기분이 든다. 얼른 몸을 추스르고 여관을 찾는다. 남도의 인심을 느끼려면 커다란 모텔보다 다소 허름한 집을 찾아가야 한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가지가 휘어지도록 꽃눈을 단 목련나무가 바르게 앉아 있는 민박집을 찾아든다. 역시 할머니의 남도 사투리가 음식 맛에서 묻어나온다. 도시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원천리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닌지…. 조계산은 호남 정맥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의 무등산, 영암의 월출산과 함께 전라남도의 명산이다. 869봉을 중심으로 남으로 뻗어내린 두개의 능선에 동편에는 선암사, 서편에는 송광사가 자리하고 있어 조계산은 산행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절의 길목으로 그 역할이 크다 하겠다. 두개의 능선을 넘는 재는 선암사쪽은 ‘선암 굴목이재’라 하고, 송광사쪽은 ‘송광 굴목이재’라고 한다. 선암사 가는 길은 매표소에서부터 비포장 길이어서 느긋하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한적한 길에는 계곡의 물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고 낙엽을 떨군
나목들이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같은 낙엽 지는 참나무들과 고로쇠나무, 층층나무 등이 계곡을 점령하고
산쪽으로는 비목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길은 고즈넉하고, 곳곳에 길 중간에 서 있는 거대한 졸참나무가 사천왕상처럼 부리부리
내려다보고 있다.
이어 첫 번째 부도밭 주위에는 삼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동백나무와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두 번째 부도밭을 지나면 두개의 목장승이 길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 중 한 장승의 가슴에 새겨 있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방생정계’(放生淨戒).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장승을 뒤로 하면 바로 선계가 펼쳐진다.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신선이 하늘로 오른다는 승선교(昇仙僑)다. 이곳 경치의 아름다움은 승선교
아래에서 보는 것이 좋다. 무지개가 물에 비치어 원이 되고 그 안에 강선루가 모습을 드러내면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승선교를 건너 하늘로
올라간단다. 잠시나마 너럭바위에 앉아 신선놀음(?)에 빠져 있는데 어느덧 승선교에 해가 비치어 영롱한 기운이 다리를 감싼다.
하얗게 꽃핀 팔손이나무
강선루를 지나면 계곡쪽으로 풍개나무와 비목이 나란히 있고, 그 앞에는 형상이 기묘하다 하여 ‘귀면나무’라 이름 붙여진 나무가 천연덕스럽게 서 있다. 줄기가 울퉁불퉁하게 변하는 서어나무다. 절 입구 연못가에는 전나무 세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전나무는 어디서 보아도 늠름하고 씩씩하다. 그 푸르름은 사철 변함이 없고, 하늘을 향한 그리움으로 곁눈을 주지 않은 채 뾰족하게만 자란다. 그 옆에 삼인당(三印塘)이라는 연못은 신라 경문왕 2년에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에 의해 축조한 것이라 전해지는데, 그 가장자리에 섬이 있고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절 앞 오른쪽에는 야생 차밭이, 왼쪽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상록성 수종인 금식나무가 심어져 있다. 꼬부라져 오르는 길 오른쪽에는 층층나무에 말채나무 팻말이 갸우뚱하게 붙어 있다. 이 정도 크기의 말채나무라면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지가 말의 채찍처럼 늘어지고 수피는 감나무처럼 가로세로로 터지기 때문이다. 팻말은 잘못 붙이면 아니 붙이니만 못하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팔손이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다. 남쪽에 내려오면 외래 수종 같은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대표적인 게
팔손이나무다. 잎이 넓고 손바닥처럼 갈라진 모습이 이채로우나 남해안 비진도에 가면 그 자생지를 볼 수 있다. 겨울철 남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조그만 어촌마을 돌담 너머로 하얀 꽃을 둥글둥글 피운 팔손이를 만날 수 있다. 오가피나무나 엄나무처럼 두릅나뭇과의 나무로 늘 푸르다.
선암사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승선교, 해우소 그리고 고매(古梅)이다. 해우소로 치자면 전국의 사찰 중 단연 선암사의 해우소를 꼽을
일이다. 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느끼는 배설의 기쁨도 잠시 “대소변을 미련 없이 버리듯 번뇌 망상을 미련 없이 버리자”는 글귀에 정신이
번쩍 뜨인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이다. 편리한 곳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스님들이 가장 아끼는 곳이다.
그리고 고매란 오래된 매화나무이다. 선암사에 가서 매화꽃을 보지 못하고 왔다는 것은 서울에 가서 남대문을,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을 못 보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 이른 봄 탐매(探梅)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암사의 매화들은 천년 고찰답게 600살이 넘은 백매를 비롯하여 무우전 돌담
주위에 수백년 된 홍매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양화소록>에 “고매(古梅)는 가지가 갖가지 모습으로 굽어 있고 푸른 이끼와 비늘
같은 주름이 몸을 감싼다”라고 되어 있다. 과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혹여 설중매(雪中梅) 같은 조매(早梅)가 한 그루 있지 않을까
살펴보아도 꽃봉오리만 발그레할 뿐 소식이 없다. 바람에 실려오는 암향(暗香)에 세속의 때를 털어버리고 싶었음인데, 세상에 철 모르는 과일만
먹더니 이제 수백년 고매 앞에서 때이른 꽃을 내놓으라고 한다. 경내에는 온갖 나무들이 눈에 띈다. 측백나무, 삼나무, 후피향나무, 배롱나무, 수양벚나무, 영산홍, 은목서, 이팝나무, 불두화 등등.
자료를 보면 90여종의 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중 외래 수종이 4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흔히들 선암사는 아름다운 절로 묘사하는데, 이는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청정함과 사철 끊이지 않는 꽃들로 꾸며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철쭉이나 동백, 목서, 금식나무,
둥근향나무 같은 상록성 나무들은 통풍과 채광성이 떨어져 목재로만 된 건물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송광사 가는 길은 찻집을 지나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산길이다. 푸른 식대가 서걱거리는 대숲과 리기다소나무 조림지를 지나면 왼쪽에는 묵정밭이 이어지고, 오른쪽 계곡에는 펑퍼짐하니 넓은 순 낙엽 활엽수림이 펼쳐진다. 이어 마른 개울을 건너면 오동나무 밑에 복분자 딸기나무가 마치 철조망 두른 듯 하얀 줄기에 가시가 나 있다. 복분자는 가지 끝이 땅에 닿으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쉽게 가시밭을 이룬다. 이어 묵정밭은 오른쪽으로 옮겨가고 왼쪽 산 능선은 편백림이다. 빼곡히 들어찬 편백숲 사이로 빛이 들어와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주워담을 녹색 잎이 없다. 즉, 어린 후계목이 없다는 얘기다.
껴안아주고 싶은 노각나무
나무계단 양쪽으로는 오동나무와 팽나무가 일주문처럼 버티고, 편백림 가장자리 돌탑 맞은편에는 이 산의 특산 나무인 제법 큰 털조장나무가
있다. 밑동의 지름이 10여cm에 키가 3m 정도 되는 나무로 가지 끝에 잎눈이 뾰족하게 나와 있고 그 주변에 둥그런 꽃눈들이 감싸고 돌아 쉽게
구분이 된다. 털조장나무는 생강나무와 같은 녹나뭇과의 낙엽 지는 떨기나무로 노란 꽃이 필 때는 이제 막 벌어지려고 하는 뽀송뽀송한 잎을 목도리
두르듯 감싼다.
왼쪽으로는 편백림이 길게 이어지고, 오른쪽은 순천시에서 야생화를 심고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두 번째 탑 앞에는 잎자루가 길고 잎맥이 손바닥같이 퍼진 잎이 길에 널려 있다. 아리송하다. 도감을 이리저리 뒤져 한참 만에야 이 나무가 ‘이나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도 끈을 놓으면 쉽게 잊혀진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지?’ 하고 물었을 때 ‘응, 그게 내 이름이야!’라고 대답했을 텐데 부르고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편백림이 끝나고 왼쪽으로 휘어지며 오르는 길에는 노각나무가 곳곳에 눈에 띈다. 노각나무는 덤덤하게 얘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피가 너무 예쁘니까. 입에 침이 튀도록 칭찬을 해도 모자랄 노각나무는 옷 잘 입은 신사와도 같다. 수피는 모과나무나 산딸나무처럼 커다란 조각으로 떨어지고 미끈하다. 한번쯤 껴안아주고 싶은 나무이다. 조계산은 두 거찰을 품을 만큼 부드럽고 웅숭깊은 산이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사람주나무, 대팻집나무, 굴피나무들이 서어나무와 섞여 자라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현상은 서어나무와 사람주나무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서어나무가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성미가 있다면, 사람주나무는 가늘고 미끈한 줄기에 수피마저 하얀 것이 서어나무와는 사뭇 다른 여성스러움을 풍긴다. 사람주나무는 대극과의 작은키나무로 주로 남부지방의 산에서 자란다. 여러 개의 줄기가 올라와 팔뚝 정도의 굵기로 크며 줄기를 만져보면 흰
분이 묻어나는 것도 있다. 추운 지방일수록 수피가 하얗게 되는데, 이곳은 따뜻한데도 수피가 하얀 것은 바닷바람 탓인 것 같다. 유난히도
서어나무와 사람주나무가 눈이 많이 띄는 것은 서어나무만 많으면 자칫 삭막(?)해질 것을 우려한 조계산의 깊은 배려가 아닌가 싶다.
방생정계, 나무는 말이 없다
이어서 된비알을 오르면 선암 굴목이재다. 선암 굴목이재를 내려서면 길이 갈라진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조계수를 가로질러 옛날 보리밥집에
닿는다. 펄펄 살아서 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야채에 보리밥을 비벼먹고는 송광 굴목이재로 향한다.
이곳은 너른 분지에 고만고만한 키의 낙엽수들이 자라고 송광 굴목이재에 오르니 해는 서산에 기운다. 송광 굴목이재에는 굴목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팻말에 붙어 있다. 한 가지 내 생각을 더 추가하자면 주변에 굴참나무가 유난히 많아 굴목이재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순천 시민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부지런히 걸어 송광사에 이르니 이미 어둠이 깔리고 산사는 무겁게 내려앉은 듯 고요하다. 우화각 앞에 이르니 어둠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나무가 있다. 누군가가 심은 어린 칠엽수인데 나무 표지판을 묶은 나일론 줄에 목이 졸려 신음하고 있다. 칠엽수는 다른 나무와 달리 속성수이기 때문에 다른 나무보다 먼저 살 속 깊이 파고들었다. 끈을 제거하고 보니 깊게 파인 흠이 안쓰럽다. 방생정계(放生淨戒)의 뜻은 모든 생물에게 베풀어야 할 이치일진대 동물만 생물이고 식물은 생물에서 멀어짐은 어이된 일인가. 그래도 나무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침묵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존재들이니까.
우종영씨는 야생화 사진 작가이자 나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겨레 문화센터를 비롯한 각종 시민 단체에서 나무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풀코스 나무여행> <나무야, 나무야 왜 슬프니?>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게으른
산행> 등이 있다.
산행 길잡이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은 조계산 등정을 하고 송광사 가는 길과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바로 가는 길로 나뉜다.
- 1코스: 바로 가는 길
선암사 → 선암 굴목이재 → 송광 굴목이재 → 송광사(6.6km)
- 2코스: 조계산 등정
선암사 → 조계산 → 연산봉 → 굴목이재 → 송광사(8.4km)
- 3코스: 곱향나무 보러 가는 길
선암사 → 선암 굴목이재 → 천자암 → 송광사(10.9km)
주변 볼거리
- 순천만의 겨울 철새: 갈대와 갯벌이 어우러진 철새의 낙원
- 쌍암면의 이팝나무: 천연기념물 제36호
- 천자암의 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
- 고인돌 공원: 전국 최고의 고인돌 공원
- 주암호의 아침 물안개: 조계산과 모후산 자락의 인공 호수
- 낙안마을: 전통 가옥과 성곽길 산책로
숙식
- 집단 시설 지구 내 조계산장, 길상식당, 민박집
교통
- 자가용: 호남고속도로에서 순천 조금 못 미쳐 승주IC를 나와 우회전
- 대중교통: 순천역 앞 1번 버스(40분 소요)
고속터미널 앞 100번 좌석(30분 소요)
송광사에서 광주 가는 버스를 타면 1시간30분 정도 소요되므로 광주에서 고속철도(KTX)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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