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사진

선유도(仙遊島)

작은岳馬 2007. 6. 13. 16:02

 

선유도(仙遊島)                             

                                                                              글 : 오마이뉴스 김준 기자, 사진 : 강일구

                                                                   

선유도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에 속한 섬으로 시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40.2㎞ 떨어져 있다. 무녀도·신시도·갑리도·방축도·말도 등과 함께 고군산군도를 이루며, 군도의 중심섬이다. 본래는 3개로 분리된 섬이었으나 중앙에 긴 사주(砂州)가 발달되면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고려 때 최무선(崔茂宣)이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진포(鎭浦) 해전기지였고, 임진왜란 때 함선의 정박기지이며 해상요지였다. 최고 지점은 망주봉(152m)이며, 낮은 구릉지가 많다. 대부분 사빈해안으로 중앙에 사주와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농산물로 쌀·보리·고구마·마늘·고추 등이 소량 생산된다.

연근해에서는 멸치·조기·바지락·꼴뚜기·주꾸미 등이 많이 잡히며, 김 양식이 이루어진다. 구릉지 밑에 취락이 주로 분포하며, 중앙에 발달한 선유도해수욕장은 고군산 8경 중 하나로 피서객이 많다. 해수욕장의 백사장 길이는 약 2㎞로 경사가 완만하며, 물이 맑고 모래의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모습이 일대 장관을 이룬다. 또한 망주봉 기암절벽에는 망주폭포가 있어 피서객의 관광 코스가 되고 있다. 남서쪽에 있는 장자도와는 장자교로 연결되어 있어 쉽게 왕래할 수 있으며, 군산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면적 2.13㎢, 해안선 길이 12.8㎞, 인구 484, 가구 167 이다.

 

 군산항 연안여객터미널

 

 선착장에서 바라본 선유대교

 

 

망주봉(望主峰 152m)

 

고군산군도를 대표하는 섬이 선유도라면 선유도의 상징은 망주봉(望主峰)이다. 152m의 낮은 바위산이지만 망주봉은 방문객들에게 각인되는 고군산군도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송나라의 사진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동경>에는 '군산정은 바다에 닿아있고, 뒤에는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길이나 치솟아 있다'라고 적고 있다.

망주봉이라는 이름은 옛날 이곳 선유도에 유배된 충신이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북쪽의 한양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여 붙은 명칭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천년 임금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부부이야기도 전한다(출처, 군산도서지). <
정감록>에 뿌리를 둔 천년임금의 이야기는 이렇다.

"이씨 조선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그 후에는 범씨가 고군산(선유도)에서 천년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야기를 믿고 천년도읍을 이룰 왕이 북쪽에서 온다는 말에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북쪽을 보고 서 있다 지쳐서 바위가 되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걸작이다. <정감록>에는 고군산에 천년의 도읍이 되는 때가 퇴조(退潮) 300리 즉 바닷물이 현재의 해안선에서 300리 밖으로 물러난 후라는 것이다. 새만금사업으로 야미도와 신시도까지 육지와 연결되어 차량이 드나들고 있고, 머지않아 신시도와 무녀도를 연결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선유도는 육지나 다름없기 때문에 <정감록>에서 예언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새만금사업을 빌미로 선유도를 중심으로 국제해양관광도시를 꿈꾸는 군산의 희망이 예언처럼 현실로 드러날지 흥미롭다.

 

 

 

명사십리해수욕장

 

최근 선유도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선유해수욕장'과 '낚시'때문이다. 모래밭이 넓고 길어 명사십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선유도 해수욕장은 1965년 옥구군 시절에 개장하여 2005년에만 해도 6만 4000여 명이 찾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가져온 모래는 진말과 망주봉을 연결시켰다.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작은 모래가 파도에 밀려와 바람에 날려 만들어낸 사구가 망주봉 앞에 모래밭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이곳 모래밭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해당화가 만발한 백사장으로 수군진의 병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고군산지역에서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목숨을 앗아가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선유도 해수욕장 앞에는 솔섬이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을 기준으로 밭너머마을 쪽으로는 양식장이 마련되어 있고, 진리쪽으로는 관광객들이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갯벌이다. 해수욕객이 몰려드는 여름철이면 이곳에는 출입을 막는 줄이 쳐진다.

 

 대장도

 

 부인바위

 

 남편바위

 

  

 

 당아욱

 

 망주봉 뒤 선착장에서

 

   

 

 솔섬

 

 

 

 

 

 해당화

 

 

 산골무꽃

 

 

 오룡묘(五龍廟)

 

망주봉과 함께 선유도에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가 밭너머 마을 옆 망주봉 기슭의 오룡묘다. 오룡묘는 매년 당제와 3년마다 별신제를 모셨던 제장이다. 오룡묘에 모셔진 오구유왕, 명두아가씨, 최씨부인, 수문장, 성주 등 5매의 화상과 오룡묘 뒤쪽 임씨 할머니당에 모셔진 산신님, 칠성님, 임씨할머니 화상 모두 도난을 당했다고 전한다.

선유도 별신제는 한때 수군절제사가 주관했었지만, 진이 없어지면서 마을에서 주관하고 경비는 칠산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선주들이 부담했다. 당시에는 10년에 한번 씩 별신제를 거행했는데, 별신제에는 무당만 해도 3명, 연주하는 재비들이 5명 동원되어
삼현육각이 볼만해 육지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올 정도였다.

별신제는 60여 년 전, 그러니까 조기잡이가 성하던 시절에 마지막 거행되었다. 그 후에도 별신제는 중단되었지만 조기잡이를 나가는 어민들은 초사리(봄철 첫 작업을 해서 잡은 조기)에 잡은 제일 좋은 조기를 골라 임씨 할머니당에 바치기도 했다.

 

  

 

 망주봉과 명사십리해수욕장

 

  

  

 

 

 

 

 인동덩굴

 

 

 대장도

 

  

  장자대교

 

 

 

 

 

 

 땅채송화

 

 대장도의 장자할매바위

 

 

 

선유도는 고려시대에 수군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긍의 기록에서 보면 "군산도에 도착하니 6척의 배에 무장병을 싣고 나와 영접했으며 배가 군산도로 들어가자 깃발을 든 병사가 100여 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선유도는 해상교역을 활발하게 하던 고려시대 군사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던 시기에 수군기지를 강화했으며, 조선 태조 6년(1397)에 선유도에 수군만호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세종 때 군산으로 옮기고, 망주봉 기슭에 수군기지를 설치했다. 당시 이곳 수군기지는 절제사가 파견되어 임피, 옥구, 만경, 김제, 부안, 고창, 무장, 영광 등 8개현의 해상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600년에 선유도 중심마을인 진말에 다시 설치되었다.


<정조기록>에는 군산도의 가구수는 모두 600호라고 적고 있어, 30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할 정도로 큰 규모였을 것이다. 지금도 진말의 우체국 뒤쪽 산기슭 진터가 남아 있고 기와조각과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체국 인근에는 5기의 수군절제사 선정비가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비석들은 길 위쪽 진터의 옛 길가에 있었던 것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비석들이 있었지만 새로 도로를 만들면서 유실되었다고 한다.

 

선유도는 신시도, 무녀도, 방축도, 관리도, 명도 등 크고 작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호수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바다는 일찍부터 어민들의 생업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선유도를 가는 유람선을 타고 풍력발전기를 세워두고 새만금사업이 친환경사업이라 시위하는 비응도를 지나 20여 분 쯤 가다보면 바다에 줄지어 떠있는 부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김 양식 시설로, 조류가 좋으면서 파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선유도 앞바다가 양식의 적지였다.

 

 

 

 갯까치수영

  

  

  돌아오는길 무인도

 

 

 

 

 

 

2007년 06월 15일

강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