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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박은 혈침 제거에 인생 건 사람, 소윤하씨

작은岳馬 2006. 3. 10. 11:09
일제가 박은 혈침 제거에 인생 건 사람, 소윤하씨

“극우 일본인들 혈침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

▲ 일제가 박은 혈침 제거에 가진 것 모두를 쏟아붓고 있는 소윤하씨.<사진=김승완 기자>
지리산에서 또 혈침이 발견, 제거됐다고 신문마다 났다. 이번 것은 흡사 로켓포탄처럼 생겼다. 지름 11cm, 길이 110cm의 순동으로 무게가 무려 80kg이나 된다고 했다. 박혔던 곳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의 해발 1,600m 옥녀봉 정혈 자리라고 한다. 너무 무거워서 뽑은 것을 들고 내려오는 데 산청군청 직원 네 사람이 매달려서도 쩔쩔 맸다.

이따금씩 잊을 만하면 들려오곤 하는 혈침 소식이다. 일제가 박았다는 혈침이 그렇게도 많은가. 그리고 그 혈침을 제거하는 사람, 단체도 그만큼 많은 것일까.

오래 전의,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 구윤서란 이가 생각났다. 이번에 옥녀봉 혈침을 제거하고 지리산 지기를 이어받아 큰 인물이 많이 나라는 산신제도 올린 단체는 민족정기선양위원회라는 모임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은 단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민족정기선양위가 이제는 거의 유일하게 혈침 제거에 애쓰고 있는 단체였다. 아니, 알고 보니 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소윤하라는 이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텅빈 모임이었다. “힘들어서 모두 떠났다”며 소 위원장은 안경을 치켜올렸다.

“구윤서씨가 97년 세상을 떠나고나서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은 흐지부지 됐답니다. 85년 구씨가 북한산 백운대 쇠말뚝을 뽑아내며 처음 모임을 만들 때만 해도 저는 같이 국학 연구하는 사이라 그저 모양 갖추기로 도와주자는 기분이었지요. 그러다 차차 그게 아니구나 싶어지더니 나중엔 소름끼치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단법인 한배달 조직 안에 일제 혈침만 다루는 민족정기선양위원회를 만들고 제가 위원장을 맡았지요.”

일제 남만군 사령관 “365개 혈침 박았다”

▲ 백도 절벽에 매달려 혈침 제거작업을 하고 있는 소윤하씨. 그는 이곳 혈침 28개 제거에 사비 5천여만원을 쏟아부었다.
위원장이 곧 위원의 모두인 모임. 그러나 그 모임은 간헐적으로나마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97년부터 그간 모두 88개나 되는 혈침을 뽑아냈다. 그는 어떤 경우, 혈침 몇 개 뽑아내는 데 적게는 1천만 원, 많게는 5천만 원의 사재를 털어 넣기도 했다. 때문에 과천의 초라한 연립주택에서 반지하층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살림은 부인에게 맡기고  온통 혈침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그가 ‘일제가 혈침을 박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95년 창덕궁 인정전 뒤 지하 18m 지점에서 캐낸 석침 12개다.

“일제 남만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가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하기 전에 당시 조선인 통역관 신세우씨에게 ‘내가 소장 시절 조선땅 전역 365군데에 혈침을 박았다’고 털어놓았답니다. 신씨는 그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63년 박 대통령한테 알리고 지원금을 받아서는 아들 신동식씨와 전국을 돌면서 혈침을 많이 뽑았다고 해요. 그중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인정전 뒤의 것을 95년 우리가 뽑아낸 거지요. 지하 18m에 박혀 있는 그 혈침 자리를 정확한 제보 없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창덕궁 수라간 장독대에서 좌로 9보, 우로 9보 위치에서 18미터를 파면 석침이 나올 것’이라고 야마시타가 말했다고 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혈침이 나왔지요.”

그외, 일제가 체계적 조직을 갖추고 한반도 곳곳에 혈침을 박은 증거라 할 혈침은 많다.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백도의 혈침도 한 예다.

“야마시타의 제보에 근거해 백도에서도 쇠말뚝 혈침 28개를 뽑았지요. 큰 파도가 철썩이는 무인도의 가파른 바위절벽에 박힌 쇠말뚝 위치를 박은 자의 실토 없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뽑을 때 밧줄로 몸을 묶고 작업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야마시타가 ‘백도의 쇠말뚝은 1894년 당시 가토마루(加藤丸) 소장이 박았고, 다음해인 1895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했답니다. 그 뒤 1936년 야마시타 자신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백도에다 혈침 12개를 더 박았다고 합니다. 제가 뽑은 28개 혈침 중 16개는 몸통에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다른 12개는 굵은 철근과 흡사했어요. 이 두 종류의 혈침이 재질도 다르고 부식된 정도도 달라서 상당한 세월의 차이가 보였습니다.”

▲ 혈침이 박혀 있던 백도 절벽. 박은 당사자인 야마시타의 제보가 없이는 이 자리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100여 년 전에 무인도의 가파른 절벽에까지 이런 혈침을 수십 개 박으려면 큰 조직의 치밀한 설계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를 억누르는 일에 그렇게까지 철저하고 집요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서경대 서길수 교수(61?전 고구려연구회장)는 “일제의 풍수침략 만행에 대하여 아직까지 문헌 기록으로는 확인을 못했지만 수없는 증언과 구전 및 지금까지 120여 회 걸쳐 뽑아 놓은 실물 증거를 통해 볼 때 치밀한 계획 하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894년은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 15년 전이다. 그 때 일제는 이미 조선을 강탈할 모든 계획을 수립,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1931년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라는 책은 상당한 깊이를 가졌다는 풍수가들의 평가다. 이런 일제가 심리적인 측면에서라도 혈을 끊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리 없다. 소 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는 음양사라 부르는 술사, 귀신을 믿는 집단이 많아요. 그중 당시 천황가(天皇家)가 포함된 극우단체가 주도해서 한 짓으로 보입니다.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각본과 설계에 따라서 혈침 작업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6년 경복궁 일부를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일본 풍수사 16명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들의 역할이 혈침과 관련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쇠말뚝을 박은 자료나 기록, 또는 지도가 천황가 주변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겁니다.”

97년부터 89개 혈침 제거…아직 수십 개 남아

혈침 자리는 우리의 전통적 풍수관에서 보아 명당인 경우도 있지만, 무관한 것도 많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들 나름의 독특한 비술(秘術)에 의거해 자리를 선정하고 혈침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소 위원장은 추측한다.

야마시타로부터 제공받은 여러 혈침 자리에 대한 정보, 그리고 한반도에서 수탈한 보물들을 싣고 가던 배가 침몰한 위치 등의 정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박 대통령 이발사를 하던 이가 가져갔다고 해서 수소문해 찾아가 만나보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소 위원장은 말한다.

▲ 지리산 옥녀봉에 박혔던 대형 혈침.
민족정기선양위가 그간 제거한 혈침은 97년 2월 진도군 군내면 녹진 앞바다 속의 4개 쇠말뚝을 비롯해 속리산 묘봉 2개, 입석대 2개,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3개, 연도(鳶島) 5개, 백도 28개, 삼각산(북한산) 탕춘대성 아래 독박골 알터 3개, 합천 황매산 모산재 무지개터 2개, 거창군 가조면 우두산 장군봉 1개, 설악산 수렴동 8개, 서산 팔봉면 진장리 시멘트 말뚝 12개, 연기군 동면 문주리 황동제 말뚝 9개, 울산 천전리 각석 건너편 절벽 3개, 울산 고헌산 정상 1개,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 1개, 강화도 마니산 4개, 그리고 이번에 뽑은 지리산 것까지 총 89개다.

이외에 우리들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뽑은 것 33개, 구 내무부 자료에 의한 것 18개 등을 합하면  총 137개가 된다. 그외, 신세우씨 부자가 뽑은 것 수십 개를 감안하더라도 한반도 전체에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소 위원장은 추측한다. 그중 70여 개는 위치를 확인해둔 상태다. 

혈침은 모양도 가지가지다. 일자형이 많지만, 어떤 것은 ㄱ자 모양으로 꺾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n자 모양이다. 거문도에서 뽑은 것은 몸통을 쪼아서 고기의 비늘처럼 만들었고, 지렁이처럼 휘거나 구부러진 것도 있다.

제보되어온 쇠말뚝 중에는 물론 혈침이 아닌 것도 여럿 있었다. 접수된 제보가 그간 100여 군데였는데, 그중 확인을 거쳐 실제 제거한 혈침이 17군데 89개다.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다며 이렇게 말한다.

“우선 제보가 들어오면 현장을 답사해서 실물이 있는지, 그리고 주변에 더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 다음, 인근 부락 노인들을 찾아가 일제 때 얘기를 묻습니다. 그때 명확히 ‘왜놈들이 우리 아버지, 혹은 동네 어른 끌고 가서 쇠말뚝 박았다더라, 시아버지께서 꼭 뽑아야 한다고 하시다가 그냥 돌아가셨다’는 등의 대답이 돌아오면 재차 측량용이나 산악등반용, 혹은 선박 고정용 등은 아닌지를 주변 지형과 더불어 상세히 살피죠. 놀랍게도 이러한 용도의 것인양 눈속임을 한 것도 여럿 있었어요.”

▲ 충무공 묘역에 어느 무속인이 박았던 쇠말뚝들.
혈침의 재질은 태반이 고가의 구리를 섞은 황동이나 청동이며, 모양은 육각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것도 많다. 단순 고정용을 이렇게 만들 리 없다는 점에서도 지기(地氣)를 혼란시키기 위한 혈침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 위원장의 말이다.

소 위원장은 혈침의 정확한 연대 측정이 가능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백도 혈침 제작연대를 서울대 기초과학 교육연구공동기기원에 의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무려 3만 년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동위원소를 이용한 방법을 썼다는데, 쇠말뚝에 섞여 있던 화석탄소의 연대가 측정돼 3만 년이란 결과가 나왔다고 했어요. 18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석탄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이 석탄의 생성연대가 나온 거죠. 한편으로 우리나라는 해방 후까지도 대장간에서 숯불로 쇠를 달구었죠. 이로 미뤄보건대 혈침을 일본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속인이 충무공, 세종, 효종 묘소에 쇠말뚝 박은 이유

이들 혈침을 두고 단순 측량용일 뿐이라 말한 학자도 있다. 그러나 해안절벽 중간 여기저기에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무수히, 그리고 10cm 정도만 튀어나오게 박은 황동 소재의 쇠말뚝이 측량용이란 말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지리산 옥녀봉 것처럼 땅에 묻은 혈침의 경우는 더더욱 측량용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혈침들이 진정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소 위원장은 “견강부회 같겠지만, 한번 들어보라”며 이렇게 말한다.

“쇠말뚝을 곳곳에 박은 지 10년 뒤 결국 국권을 잃었고, 36년간 압제에 시달렸고,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었지요. 그런데 1963년부터 혈침을 제거한 남한쪽은 번영했고 그대로 방치했던 북한은 쪼그라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우리 남한에 남은 것들 마저 다 뽑아내야 더 번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 백도 절벽에 박힌 혈침을 뽑기 위해 긴 쇠말뚝으로 옆을 뚫는 모습.
그는 99년 충무공의 현충사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 들며 “일제의 혈침 작업은 현재 진행형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99년 4월 당시 어느 무속인 모자가 ‘충무공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야밤을 틈타 충무공 묘소를 비롯해 충무공 부모 묘소, 충무공 셋째 아들 면의 묘소 등 덕수이씨 선영에 식칼 55개, 쇠말뚝 47개를 꽂았다가 검거된 사건이다. 그런데 며칠 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의 능에서도 충무공 묘소에서 발견된 것과 흡사한 식칼과 쇠말뚝이 무더기로 꽂혀 있는 것이 발견됐다.

“그게 확인해보니까 그냥 쇠말뚝이 아니라 드릴로 구멍 뚫는 데 쓰는 천공기 날이었어요. 그것이 개당 4만 원쯤 합니다. 경찰 수사 결과 여자가 어느 공업사에서 그것을 수백 개 사갔다고 하니, 300개만 해도 1,200만 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전세 600만 원 하는 7평짜리 셋방에서 겨우 살고 있던 처지로, 철학관 운영으로 생계유지가 안돼 화장품 외판원을 한 적도 있다고 신문에도 났지요. 이런 여자가 칼 구입비까지 합하면 2천만 원이 넘는 돈을 어떻게 구했다는 걸까요. 그래서 저는 일본 우익집단이 그 배후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무슨 드라마 속 얘기 같지요. 하지만 사실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일본인들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이번 지리산 옥녀봉에서 뽑힌 혈침도 대형 천공기 날로서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며, 때문에 일인들에게 매수된 누군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일까. 아직도 한반도의 기혈을 끊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일본인들이 있는 것일까.

사실일 수도 있다면, 그에 대항하는 세력은 안타까울 정도로 미미하다고 할 것이다. 소윤하씨는 혈침들을 뽑아내기 위해 그 자신이 절벽에 매달려 온종일 망치질을 한 나날도 부지기수다. 요즈음은 통풍이 와서 매일 한방치료를 받아야 한다. 소 위원장은 몸 아픈 것보다는 운신할 비용이 바닥난 것에 한결 더 애를 태우고 있다.

이들 혈침에 대해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 최명우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산소 뒤의 산줄기 맥을 자르고 숯을 넣고 뜸을 뜨듯 불을 지핀다던가 하면 그 산소의 후손들에게 다소 영향이 미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쇠말뚝이나 식칼 정도는 전혀 문제 없죠.  만약 혈침의 영향이 심대하다면 해방은 어떻게 맞았겠습니까. 일제는 실은 고도의 심리전으로 혈침을 활용한 것일지 모릅니다. 일본인들이 쇠말뚝 박을 때 몰래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을 인부로 끌고 간 것도 심리적 주술을 걸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최 소장의 말대로, 이 혈침들을 뽑지 않고 그냥 놓아둬도 그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잖아도 나랏일 제대로 돌아가는 것 하나 없는데, 기분풀이 삼아 속 시원히 몽땅 뽑아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싶다. 마침 이 일에 목을 맨 이가 있으니 시중에 떠돈다는 무려 500조 원이나 되는 돈의 주인 중 누구든, 멋으로나마 혈침 제거 자금 좀 댈 사람 없나 모르겠다.

 

글 안중국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