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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관산 환희대 일원에 만발한 억새밭. |
바람이 귀를 스친다. 아니 바람소리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원근감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사운드. 멀리 바다부터 도움닫기를 한 바람이
산을 박차고 하늘로 오른다. 그 기세에 억새는 몸서리치며 한바탕 바람을 앓았다. 천지개벽 같은 억새의 군무가 잦아든 뒤 또다시 찾아드는 정적.
천관산 산마루에도 가을이 왔다.
전남 장흥의 천관산(天冠山·723m)은 뛰어난 산세 때문에 예부터 지제산(支提山),
천풍산(天風山), 풍천산(楓天山), 신산(神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기암 봉우리들이 운집한 정상부의 독특한
모습이 인상적이라 신령스런 곳으로 여겨왔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천관산은 호남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큼 유서 깊고 수려하다. 산정 암봉들의 멋진 자태와 다도해가 엮어내는 이색적인 풍정 등 천관산을 빛나게 만드는 요소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을 천관산의 주인공은 역시 억새였다.
10월 초 억새축제가 끝난 직후 천관산을 찾았다. 천관산 고지는 이삭을
활짝 피운 억새들로 완전 점령당했다. 멀리서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말 잔등의 갈기처럼 하얗게 물결쳤다. 능선 마루에 솟아오른 바위
봉우리와 억새의 조화가 절묘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천관산은 그리 높지 않다. 산세도 유순하며 길도 잘 나 있어, 정상부까지
1시간 반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고, 반나절이면 산행을 모두 마칠 수 있는 규모의 산이다. 하지만 이 야트막한 산을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천관산은 들인 공에 비해 얻는 것이 많은 산이다. 멀리서 보는 맛도 훌륭하다. 구정봉 일대에 솟은 바위
연봉의 기묘한 실루엣은 실로 예사롭지 않다. 산으로 들어가면 더욱 감동적인 풍광을 접하게 된다. 오밀조밀한 섬들이 들어앉은 다도해와 힘찬 남녘의
산줄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맑은 날이면 한라산도 보일 정도로 조망 또한 장쾌하다. 멀리서 찾아온 시간이 아깝지 않다.
한적한 분위기가 일품인 천관사 코스
천관산 산행은 장천재(長川齋)에서 시작해 능선을 타고
구정봉을 경유해 주능선으로 오른 뒤, 연대봉을 거쳐 정원석 능선을 통해 장천재로 돌아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접근이 편리하고 볼거리도 많아
천관산에서 가장 무난한 코스라 하겠다. 하지만 장천재 기점의 원점회귀 산행은 천관산의 또 다른 볼거리인 천관사를 놓치게 되는 맹점이 있다.
천관산 서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천관사는 보물 1점과 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신라 애장왕 때 영통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데, 예전에는 많은 암자를 거느리고 1,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보물 제795호인
3층석탑과 석등(전남유형문화재 제134호), 5층 석탑(전남유형문화재 제135호) 등의 유물이 옛 가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곳 천관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비를 몰고 온 구름에 쫓겨 하루를 허송한 탓에 마음이 급했다. 일찌감치 서둘러 산으로 올랐다.
절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천관사 스님이 돌본다는 해우소 옆의 거인 억새군락. 2m도 넘는 큰 억새가 피운 화려한 꽃이 구정봉과
겹쳐지며 훌륭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시작부터 화려했다.
천관사 주차장 조금 밑의 등산로 안내판 옆 숲길로 들었다. 엄청난 높이의
산죽 사이로 터널 같은 산길이 나 있었다. 묘한 분위기를 뚫고 산을 올랐다. 산자락을 휘돌아 난 길은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 뒤 곧바로
능선을 탔다.
산길은 참나무와 잡목이 적당히 섞인 능선으로 곧바로 연결됐다. 뚜렷하고 잘 정비된 길은 예상 외로 가팔랐다. 천관산은
멀리서 보면 편안하게 생겼지만, 그다지 녹녹한 곳은 아니었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며 암봉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천관사 코스는
구정봉 능선을 밑에서부터 제대로 밟아가는 재미가 있다. 조금씩 낮아지는 주변의 산세를 감상하며 기기묘묘한 바위들 사이를 오르게 된다. 구정봉은
정상부인 환희대부터 아래쪽으로 늘어선 대장봉(大藏峰), 천주봉(天柱峰), 문수보현봉(文殊普賢峰), 대세봉(大勢峰), 선재봉(善才峯),
관음봉(觀音峰),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三神峰) 등 9개 암봉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숲을 뚫고 막판의
된비알을 치고 오르니 장천재~환희대 간의 능선과 만나는 삼거리에 닿았다. 시야가 툭 트이며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주변으로
억새밭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듣던 대로 대단한 규모였다.
주등산로에는 평일임에도 등산객이 줄을 잇고 있다. 조용한 천관사
쪽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대열에 섞여 밀려가듯 환희대에 올랐다. 환희대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진 주능선은 억새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1km 남짓한 이 넓은 능선을 향해 사람들이 계속해 모여들었다. 가을 천관산의 인기는 정말 못 말리는 것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앉아 주변을 돌아봤다. 서쪽 바다 건너로 완도와 주작산~덕룡산 능선이 파도치듯 달리고 있었다. 역동적인 산세가 매력적이었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고흥반도와 소록도가 새색시처럼 다소곳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북쪽 월출산 뒤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봉우리는 믿기지
않았지만 무등산이었다. 구름이 낀 날씨였지만 조망은 일품이었다.
땀을 식힌 뒤 본격적인 억새밭 탐승에 들어갔다. 천관산 억새밭은
넓기도 했지만 키가 크고 밀도도 높았다. 어른도 억새밭 한가운데 서면 밖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새가 무성했다. 그러다보니 조망이 좋은
바위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아예 억새밭 사이에 자리 잡고 식사하는 이들도 보였다.
구정봉 못지않게 화려한 지장봉 능선
금수굴 방면의 산길을 통해 주능선으로 오른 등산객과
합류되는 삼거리는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억새축제가 열린 연휴 때는 ‘줄을 서서 오도 가도 못했다’는 말이 실감났다. 사람들은 대부분 연대봉으로
향했다. 이미 연대봉 봉화대에는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까맣게 올라서 있었다.
사람들에 휩쓸려 주능선을 왕복한 뒤 다시 환희대에
올랐다. 오늘 하산 코스는 지장봉(630m) 능선을 통해 천관산 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되는 조금 한적한 곳으로 잡았다. 이쪽은 휴일에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조용한 편이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없는 코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구정봉 능선 서쪽으로 보이는 기암 봉우리들이 바로 이
지장봉 능선에 솟아 있다.
환희대에서 구룡봉 방면의 평탄한 길을 잠깐 가다 오른쪽 비탈길로 내려섰다. 곧바로 나타나는 기둥 같은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해 내려갔다. 잠시 후 또 다시 촛대 같은 바위를 남쪽으로 우회한 뒤 능선을 타고 하산을 계속했다.
산길은
건너편의 구정봉 능선과 나란히 이어지며 멋진 조망을 제공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기암봉 뒤로 장흥의 가을 벌판이 펼쳐졌다. 조화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계속됐다. 지장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점차 급경사를 이루며 숲으로 파고들었다. 천관산 산길은 대부분 한 번의 고빗사위는 품고 있었다.
약간의 힘든 구간을 통해 고도를 조절하는 것도 이곳 산행의 매력이라 하겠다.
지장봉 능선길은 천관산 자연휴양림의 산책로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휴양림에서 천관산을 오를 때는 이 지장봉 능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자연휴양림 내부의 도로는 인천이씨 제각으로
이어진다. 휴양림에서 천관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제각이 있는 곳에서 산길을 타고 올라서야 했다.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100m 가량 오르니 천관사 주차장에서 산 사면으로 돌아서 난 길과 다시 만났다. 여기서 주능선을 향해 잠시 오르니 능선상의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의 계곡길을 따라 천관사로 향했다. 능선길은 오전에 답사한 구정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천관사에 닿을 즈음 또다시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번 천관산 답사의 최대 난관은 날씨였다. 첫날 일출을 보려고 야영했지만 폭우 속에 철수해야했고, 두 번째
도전에는 하산길에 비를 만난 것이다. 억새는 좋았지만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는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