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르포 덕유능선 얼음꽃 터널에서 바람, 예술의 경지를 넘어서다 육십령~합미봉~남덕유~백암봉~빼재 | ||||||||||||||||
봄앓이가 유난스러웠다. 늦된 성장통 같은 삼월 큰 눈 탓인지 남녘의 꽃타령도 예년보다 늦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봄은 왔다. 양지바른
산기슭엔 생강나무가, 사람의 눈길 가까운 곳엔 산수유가 노란 꽃불을 밝히고 있다.
어둠살이 스멀거리기 시작할 무렵, 육십령(734m)에 선다. 서쪽으로 전라북도 장수, 동쪽으로 경상남도 함양을 잇는 고갯마루다. 여기서
우리는,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내려설 일만 남은 고갯길의 운명을 배반한다. 인간의 길을 따를 때는 늘 올려다볼 수밖에 없던 고갯마루가 금방 눈
아래로 멀어진다. 기분 좋은 단절감. 이제 온전히 자연의 길에 들어섰다는 모종의 우쭐함. 먼 옛날, 수렵시대의 남자들이 여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냥터를 떠날 때의 기분도 이렇지 않았을까. 할미봉은 합미봉으로 고쳐져야
예언성 지명이었을까? 아니면 훗날 만들어진 것일까? 어쨌든 도승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합미봉(할미봉) 아래엔 수연, 즉 몰리브덴 광산이 생겼고, 전국 곳곳에서 광부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굴병’(규폐증)에 걸려 동네를 과부촌으로 만들고 말았다. 광산은 곧 폐광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초쯤부터 다시 차돌광산으로 개발되어 마을 형편이 좀 나아졌다 한다. 이 마을이 바로 육십령 초입 합미봉 아래의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반송 마을이다(<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 전북편의 장수군 기사 참조). 한편 반송 마을 맞은편에, 역시 육십령 초입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군장동(軍藏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군사를 숨겨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합미봉’이라는 이름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감춰둔 군사가 있으면 당연히 군량미가 있어야 할 테니까. 갈 길이 먼데 샛길이 너무 길었다.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두대간 전 구간, 아니 우리나라 전역에 이런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허술한 기록 문화의 폐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주관적인 견해나 문학적 감성의 표현이 아니라면 최대한 엄정을 기해야 한다. 특히 명명의 오류는 개념의 오류를 낳고, 같은 사물에 대한 세대간 교감의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 10분쯤 가볍게 출렁거리듯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자 동쪽 산마루 위로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은 습기 머금은 대기를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다. 비록 아침 조망이 좋은 캠프사이트를 찾기 위한 야간산행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즐거움은 다리의 수고에 비해 과분하다. 헤드램프를 끄고 달빛에만 의지하여 20분쯤 나아가자 합미봉 정상이다. 상당히 까탈스런 암봉이다. 이런 봉우리를 어찌 할미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성미 괴팍한 노파라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합미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맑은 날 환한 대낮이라도 팽팽한 긴장을 요구한다. 필요한 곳마다 줄을 걸어 놓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두 다리가 딴 생각을 하면 잠시 후의 안녕을 보장 받기 힘들다. 거벽등반가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마치 기도를 하듯 바위에 속삭인다. 제발 나를 한 몸으로 여겨달라고. 기도발이 먹힌 건지, 무사히 암릉을 벗어난다. 돌아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다. 얼치기 자연주의자의 가소로운 기도를 들어준 산신에 영광 있기를. 얼어붙은 눈으로 빚은 바람의 연금술
합미봉을 내려서서 서봉(장수덕유산) 오름길 전까지는 평탄한 능선길이다. 1시간 가량 나아가자 서쪽으로 크게 휘는 지점이 나타난다.
캠프사이트로도 맞춤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봉을 1시간쯤 남겨둔 지점까지 가서야 배낭을 내린다. 산뜻한 출발이다.
밥 당번인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물과 불을 조절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만 잘 하면 코펠 뚜껑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고 맛있게
밥을 지을 수 있다. 나는 열 번에 일곱 번 정도의 성공률로 취재팀의 입을 즐겁게 한다. 산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여기서
잠깐 독자의 이해를 구할 것이 있다. 취사 야영 문제인데, 취재 특성상 불가피하여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사전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독자라는 ‘빽’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한 시도 잊지 않는다).
서봉 정상 직전에서 한바탕 흩뿌리는 눈을 만난다. 파란 하늘에 눈이라니. 산기슭을 오르던 바람의 장난이다. 바람의 장난?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서봉 정상에 이르면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암벽에 붙은 상고대는 섬세한 바람의 올을 정교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보다 더 빼어난
조각이 있을까. 역광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의 상고대는 또 어떤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이 있을까. 하지만 아직 최고의 감탄사는 남겨둬야 한다.
서봉에서 남덕유산을 향하는, 연줄처럼 휘어진 능선의 얼음꽃 터널에서 바람은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다. 응원 산행 나온 진주팀 김밥, 그렇게 맛있을 수가 자연현상 가운데 바람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 것 같다. 이름부터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봄에 부는 바람은 당연히 ‘봄바람’일 텐데, 느낌에
따라 꽃바람도 되고 꽃샘바람도 된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는 갈바람(서남풍), 높바람(북북동풍), 높새바람(북동풍), 높하늬바람(서북풍),
늦하늬바람(서남풍), 마파람(남풍), 된마파람(동남풍), 된바람(북풍), 샛바람(동풍), 하늬바람(서풍)으로 불린다.
바람의 세기나 느낌 혹은 꼴에 따라서는 건들바람, 고추바람, 남실바람, 노대바람, 돌개바람, 명주바람, 산들바람, 살바람, 서늘바람,
서릿바람, 선들바람, 소소리바람, 소슬바람, 손돌바람, 솔바람, 실바람, 싹쓸바람, 왜바람, 용숫바람, 피죽바람, 황소바람, 회오리바람,
흔들바람 등으로 불린다. 이밖에도 장소나 때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런 이름을 거의 잊(잃)어 버리고 산다. 우리와
거리가 먼 대서양의 허리케인이나 북아메리카의 토네이도, 히말라야와 인도양을 오가는 몬순은 알면서도.
삿갓골재대피소에서 물과 가스를 보충한 다음 진주팀과 작별한다. 그리고 2시간쯤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무룡산(1,492m) 정상. 덕유산 주능선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또 하루를 접는다. 멀리 산 아래로 넘어가는 태양을 아끼며 바라본다. 햇살이 고개를 들기도 전부터 무룡산 정상은 일출을 기다리는 주말산행객으로 왁자지껄하다. 세찬 바람은 촌각을 다투어 구름을 흩날리며, 깨어나는 아침 산의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무룡산에서 순한 내리막을 이루는 트레일은 동엽령 직전에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곧추서듯 백암봉(1,480m)에 닿는다. 남쪽으로 지리산 연봉, 동쪽으로 가야산 정상이 첩첩 산 그림자 위로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봉을 향하는 덕유평전. 가장 덕유산다운 풍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부터 대간 트레일은 덕유산과 작별을 고한다. 동쪽으로 크게 휘돌아 차츰 고도를 낮추며 잦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귀봉을 지나면 송계사 갈림길에 닿는다. 동남쪽으로는 송계사, 그 반대쪽은 백련사다.
송계사 갈림길에서 지봉(池峯?못봉?1,302.2m)까지는 허기지고 지친 자에게는 야속할 정도의 가팔막이다. 정상 직전은 헬기장. 지봉에서
바라보는 대봉(약 1,190m)은 또 한 번 지친 다리의 맥을 풀어 놓는다. 까마득히 떨어졌다가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단처럼
경사각을 접어가며 오르기 때문에 오히려 지봉 오름길보다 쉽다. |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백운산 르포 (0) | 2006.01.27 |
---|---|
[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역사지리 (0) | 2006.01.27 |
[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역사지리 (0) | 2006.01.27 |
[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삼도봉 르포 (0) | 2006.01.27 |
[백두대간 대장정 제6구간] 황악산 르포 (0) | 2006.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