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백운산
르포 황소걸음으로, 기나긴 오르막인 백운산정으로 중재~백운산~영취산~깃대봉~육십령 구간 답사 | ||||||||||||||
개 짓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을 열자 왈칵 겨울 아침이다. 눈이다. 천하는 순백이다. 때때로 하늘과 땅은 소리 없는 수작으로도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이 풍경소리 같다. 누굴까. 이렇게 우아한 소리의 발자국을 남길 줄 아는 새에게
‘까, 마, 귀’라는 흉측한 이름을 달아준 사람은.
백두대간의 산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 마을의 아침이 내게 묻는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동안 도대체 얼마만큼의 땀과 눈물, 사랑과 배신이 필요하냐고. 두고 온 서울을 생각한다. 내가 사는 그곳. 넘치는 잉여로 하여 가난한 곳. 소나기 같은 욕망의 사막. 그리하여 우리는 ‘한 모금 물’을 위해 산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다. 산에 목숨을 의탁하지 않는 도회의 사람들에게도 산은 목숨줄이다. 그래서 산은 신성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대간 종주가 힘든 이유들 민박집을 나설 때까지도 눈은 그치지 않는다. 올 겨울 산행에서 처음으로 스패츠까지 갖추고 중재로 향한다. 중기 마을에서 중재로 향하는 농로
초입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다. 한눈에 봐도 대간꾼들임을 알겠다. ‘산꾼’이란 말처럼 ‘대간꾼’이란 말도 이제는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타고 온 승합차의 한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다. 눈길에 미끄러진 게 분명해 보였다. 대간 종주의 어려움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사실 대간 종주는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가시기로 치면 대간 등성마루까지의 접근이 더하다. 여기에 시간을 내는 어려움까지 고려하면
걷는 일이 오히려 단순하다. 이래서 대간 종주가 힘들다는 거다.
중기 마을에서 중재까지는 30분 남짓. 눈길에 적응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중재에서 배낭을 벗고 잠시 숨을 고른다. 고갯마루에서 백운산으로
향하는 대간 등성마루의 초입에는 수십 개의 표지기들이 걸려 있다. 구간 종주자들이 입산과 하산의 기점으로 삼는 고개마다 이런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나는 서낭당을 떠올린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도깨비한테 홀리지 않은 다음에야 길 잃을 염려가 없는데 굳이
저렇게 흔적을 남겨야 할까 하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것을 건 사람들이 의식을 했건 하지 않았건,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유전자처럼
남아있는 산신에 대한 경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을 향하는 길은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높은 산을 앞에 두고 고도를 깎아먹는 이런 내리막길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끄는 당나귀에게 던져주는 당근이 이런 것일까. 중고개재에서 백운산까지 도상 거리 약 3.2km 중 3km 정도는 계속되는 급한 오르막이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정도. 백두대간을 통틀어 봐도 이처럼 내리막이라고는 없이 줄창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높은 봉우리와 낮은 봉우리 사이에는 많은 봉우리들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백운산의 경우는 오로지 오르막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정상은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경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은 틀렸다. 사전 정보는 유용하다. 이러한 사정을 미리 알고 느긋하게 황소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백운산이란 이름에 값하는 풍광 백운산 정상을 1.2km 남겨둔 지점에서 조망 바위를 만난다. 눈은 그쳤고 발 아래는 구름바다다. 백운산(白雲山)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풍광이다. 복기를 하듯이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본다. 눈 아래로 봉화산과 멀리 지리산이 섬처럼 구름 위로 솟아 있다.
우리라 하여 식도락을 마냥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다. 차갑고 딱딱한 빵 조각도 달다. 아귀(餓鬼)에게도 축복이 있을진저. 다음으로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호사는 커피. 일회용 커피는 사절이다. 취재팀의 구인모 선생이 개발한 휴대용 드립에 필터를 걸고 원두커피를 내린다. 그런데 언제 보아도 이 휴대용 드립이 걸작이다. 60~70년대에 대중목욕탕에서 보았던, 때 건지는 그물을 축소시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이 드립은 눈 녹인 물의 각종 건더기(?)를 거를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만약 등산 장비메이커에서 이와 유사한 물건을 대량 생산한다면 분명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구인모 선생의 장비 튜닝 솜씨는 신의 경지다. 한 예로, 군용 숟가락(여럿이 코펠 밥을 먹을 때 재빨리 많은 양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품)도 그의 손을 거치면 딴 물건이 된다. 일단 가운데를 잘라 무게(?)를 줄이고, 리벳으로 두 개를 이었는데 그냥 이은 게 아니고 길이를 줄일 수 있는 접철식이다. 이쯤이면 가히 신의 경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백운산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육십령까지는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편안한 길이다. 중재에서 백운산까지의 종주자가 트레커였다면, 백운산에서 육십령까지의 종주자는 하이커로 보면 된다. 이 구간에서 나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가지 했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 정상까지 도상 거리 약 2km와 백운산에서 영취산 아래 3km 지점까지 만보계로 걸음 수를 재봤다. 각각 7,200걸음과 7,150걸음. 쉬는 동안 헛걸음까지 들어간 숫자이므로 약 7,000걸음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경사도에 의해 2km와 3km가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시간도 2시간 정도로 같았다. 여기서 평균값을 얻을 수 있겠다. 5km에 14,000걸음. 그렇다면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을 걷는 데 몇 걸음이 필요하고, 걷는 데만 드는 시간이 얼마일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걷는 데만 182만 걸음 필요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등성마루를 걷는 데만 182만 걸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감을 위해 서울~부산 간 걸음 수와 비교해 보자.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부산 고속터미널까지는 약 430km. 이 경우는 평지이므로 군인들의 제식 동작의 바른 걸음, 즉 보폭 77cm 1분 120보로 환산해 보자. 약 55만8천 걸음이다. 시간으로는 약 77시간. 하루에 10시간씩 걸으면 8일 정도. 걸음 수만으로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 종주에 필요한 걸음 수를 서울 부산에 대입하면, 왕복을 하고도 편도로 한 번 더 갔다가 서울서 대전까지 갈 수 있다. 시쳇말로 진짜 장난 아니다. 다시 백두대간으로 돌아가서, 5km 14,000걸음을 4시간으로 잡았을 때 총 소요시간은 약 520시간. 잠도 자지 않고 걸으면 21일, 하루 10시간씩 걸으면 52일쯤 걸린다(겨울철이 아닌 경우). 뛰듯이 걷는 종주가 아니라면 실제로 이 정도가 소요된다. 재미삼이 시작한 얘기였는데 너무 길어졌다. 개인적인 걸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참고는 될 것 같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신상 정보를 밝히자면, 키 168cm 몸무게 52kg으로 좀 왜소한 편이다. 햇살이 사선으로 비치며 산주름이 선명해질 무렵 영취산(1,076m)에 닿는다. 대간이 정맥 하나를 풀어 놓는 지점이다. 서쪽으로 무령고개를 넘어 남서쪽으로 장안산을 지나 주화산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진다. 한남금북정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남정맥은 대둔산과 계룡산을 올려 세우며 부여로 향하고, 호남정맥은 남서쪽으로 휘돌며 내장산과 추월산 무등산을 일으키고는 광양 백운산에서 발길을 멈춘다. 금강·섬진강·영산강·동진강·만경강·탐진강 등의 물줄기들이 모두 이 두 산줄기를 젖샘으로 몸집을 키워 대전·공주·부여·전주·광주·순천 등의 충청·호남 지역을 품에 안는다. 영취산에서 무령고개까지는 10분 정도의 내리막길. 고갯마루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샘과 캠프사이트가 있다. 영취산 정상에서 20분쯤 지나자 억새 숲이 나타난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담한 캠프사이트다. 오른쪽 기슭으로 100m쯤 내려가면 물도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냥 지나친다. 눈을 녹이기로 했다. 억새 숲에서 30분쯤 지나자 오른쪽으로 덕운봉이 보이고, 잠시 후에 영취산과 백운산이 한눈에 담기는 전망대 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전망을 즐기기 위해 좋은 캠프사이트를 지나친 우리는 등산로 위에 대충 집을 짓고 하루를 접는다. 옅은 구름에 어린 달무리가 곱다. 한 여인 논개의 이름을 떠올리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바람도 잠잠했는데, 900m의 고도는 밤새 우리가 내뿜은 숨결을 얼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텐트 안은 성애로 한
겹 덧씌워져 있다. 해독 불가능한 첨가물로 가득한 눈 녹인 물로 아침을 지어 먹고 나자 대기는 다시 태양의 온기로 충전된다. 산죽밭을 헤치며
깃대봉을 향한다. 민령을 지나도 과거 종주자들이 대간 줄기의 표지로 삼았던 송전철탑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니 철거 후의 흔적만 보인다.
철탑 자리를 지나 오름길의 정점에 서자 시야가 환히 열린다. 왼쪽 기슭 아래에 저수지가 보인다.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의 오동제(梧桐堤)다.
한 여인을 떠올린다. 백두대간의 서쪽 기슭에서 태어나 동쪽 기슭에 묻힌 그 여인의 이름은 논개. 오늘날 우리는 그녀에게 ‘충절’을 헌사하고
있지만, 현실 속의 그녀에게 주어진 건 가혹한 운명뿐이었다. 주촌 마을에서 주달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빚더미에 치인 외삼촌이 부자의 첩으로 그녀를 팔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는 장수 현감 최경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모녀는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들며 최경회의 가솔이 된다. 이후 현감 부인인 죽자 그녀는 최경회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모진 운명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우병사가 된 최경회가 진주성 싸움에서 패하고 남강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이에 그녀는 왜군들의 승전 연회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야우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당시 논개에게
바쳐진 헌사는 충절이 아니었다. 왜적의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에서는 장례마저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녀는 주촌 마을의 맞은편, 백두대간 동쪽
기슭 함양군 서상면 방지 마을에 묻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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