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삼도봉
르포 ‘실종된 봄’ 찾아 삼봉산 싸리숲 허위허위 빼재~삼봉산~대덕산~삼도봉~화주봉~우두령 답사 | ||||||||||||||||||||
봄! 산은 온 만신이 간지러운 것이다.
어느 계절이 ‘봄’만큼 오관을 골고루 어루만질 수 있을까? 산 아래는 봄이 가득한데 여기 대간 능선은 아직 겨울
빼재(930m)에서 산행 채비를 마치는 순간 예상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봄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아리다. 해발 1,000m에 가까운 고도는 완강하게 봄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 우리는 빼재휴게소 마당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휴게소 주인의 호의로 주유소 건물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예약한다.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를 잇는 726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갯마루인 빼재는 이름이 여럿이다. 빼재라는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냥꾼과 도적들이 많아 그들이 잡아먹은 동물의 뼈가 가득하였다 해서 붙은 것이라 한다. 뼈의 경상도 사투리가 ‘빼’인 때문이겠다. 무주쪽에서는 고개 아래 동네인 상오정 마을 이름을 따서 상오정고개라 불렀다 한다. 그러다가 다시 신풍령(新風嶺)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농촌 개발이 한창인 시절의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제는 ‘수령(秀嶺)’이라는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뼈’ 가득한 재가 ‘빼어난 재’로 바뀐 것이다. 괜한 시비를 하자면 상징 조작인 셈인데,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한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새벽 같이 밥을 지어 먹고 신발 끈을 조인다. 비 개인 아침 숲의 표정이 해맑다. 포르르 산새라도 날아오르면 생동감이 더할 텐데, 아무 기척도 없다. 그들도 시끄러운 고갯마루는 싫은 모양이다. 도로에 헐린 산허리를 밟고 대간 마루에 선다. 아직 이곳 대간의 등마루는 겨울잠에서 다 깨어나지 않고 있다. 봄의 북상 속도가 고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산의 대부분이 나지막해서 만만해 보여도 1,000m 이상의 고도는 결코 가벼운 높이가 아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 산의 평균고도는 482m로 아시아의 평균 고도인 960m에 비해 아주 낮은 편이다(한국인의 산악관 고찰―오악과 진산을 중심으로―, 이형석). 하지만 아시아의 평균을 히말라야의 산군들이 높여 놓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000란 높이는 그리 녹록치 않다. 참고로 미국인들이 우리의 백두대간처럼 여기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평균고도도 1,000m 정도다.
아무튼 산 아래는 봄이 충만한데 겨울에 가까운 등성마루를 걷는 심정은 상당히 곤혹스럽다. 특히 독자들에게 뭔가를 전해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죄스럽기조차 하다. ‘집 나간 봄을 찾습니다’ 하고 실종 신고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다. 소사고개 향하면서 낭떠러지처럼 급전직하
해가 산마루 위로 고개를 들자 오히려 시야는 흐려진다. 우리네 봄의 불청객, 황사 때문이다. 1시간쯤 더 진행하자 또 조록싸리와 억새군락이 나타난다. 끝없이 배낭을 잡아당기는 싸리숲을 지나 서서히 키를 높이자 삼봉산이다. 출근을 한 직장인들이 아침 커피를 마실 시간이다. 나는 폐부 가득 바람을 들이킨다. 삼봉산(1,264m)의 정상 표지석에는 ‘덕유삼봉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봉우리까지를 덕유산군에 포함시킨 발상인 것 같다. 산경표에도 덕유산 옆에 삼봉이라 병기돼 있다. 향적봉에서 바라봤을 때 이 산의 세 봉우리가 가장 선명한 메 ‘山’ 자 형상으로 보일 것도 같다. 삼봉산을 지나면서 조금씩 키를 낮추는 대간의 등성마루는 동쪽으로 크게 돌아 소사고개를 향하면서부터는 낭떠러지에 가까울 정도로 급전직하한다. 등성마루 가까이는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신경을 곤두세운다. 눈을 벗어나자 더 미끄러운 진창이다. 이른 봄산행의 통과의례다. 그런데 이런 구간을 여럿이 지나고 보면 산행 경력과 체력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바짓가랑이 아래에 묻은 흙의 정도가 그 증표다. 이런 사실을 일찍이 간파한 나는 최대한 속도를 줄여 바지의 청결 상태 유지에 온힘을 기울인다(독자 여러분, 부디 ‘잔머리’라고 오해 마시길. 나는 그저 백두대간 종주자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파른 기울기가 거의 누그러지자 사람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대간의 정상적인 트레일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고, ‘사유지이므로 출입을 금함’이라는 야박한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옆에는 ‘백두대간 보존법 결사반대’라고 적은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구호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느슨한 잣대로 보면 ‘편리공생(片利共生)’이고, 엄격히 보면 기생의 관계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착잡한 심정은 거둘 길 없다.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이 법의 취지가 농촌 사람들의 삶을 옭죄는 데 있는 건 아닐 텐데, 입법과 시행의 과정에서 정부는 왜 세련된 설득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트레일을 가로지른 철조망 곁의 묵정밭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모닝빵에 햄, 치즈, 피망을 곁들인 즉석 햄버거와 커피. 그런데 일행 중 덩치가 크고 뱃구레가 큰 상우 아빠(절대 실명은 밝힐 수 없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는 식단을 짠 나에게 농 반 진 반의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 또한 어쩔 수 없다. ‘무게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싶지 않은 나의 선택은 ‘덜 먹기’밖에 없으니까. 아마 다음 산행에서 그의 배낭은 갖가지 화려한 먹을거리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 립서비스를 아낄 이유가 없다. “상우 아빠, 내려가면 짜장면 곱빼기 사 줄게.” 왕조의 절대 권위보다 더 큰 산의 영향력 점심을 마치고 청보리밭을 가로질러 소사 마을로 내려선다. 보리 수확 후는 여름 배추로 가득할 밭이다. 고랭지 채소농사로 이름 난 곳이다.
보리 밭 옆에 호식총(虎食塚)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시루가 얹혀 있는 것으로 보아 호환을 당한 사람의 무덤인 것 같다. 민속학에서는
호식총 위의 시루를 하늘의 상징으로 본다. 그리고 시루의 구멍에 물레에서 쓰는 쇠고챙이를 끼워 창귀(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귀신)를 누른다고
한다.
소사고개에서 대덕산(1,290m)을 오르기 위해서는 초점산(1,210m)을 거쳐야 한다. 초점산은 삼도봉으로도 불리는데, 경북 김천, 경남 거창, 전북 무주의 경계를 이룬다. 느긋한 걸음이라면 초점산(삼도봉)까지 2시간, 초점산에서 대덕산까지 1시간은 잡아야 한다. 초점산에서 대덕산까지의 능선은 부드럽게 허리를 낮추었다가 올라서는 길인데, 키 작은 참나무와 조록싸리, 조릿대,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참나무도 고산의 그것처럼 키가 작은데, 마치 관목처럼 뿌리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것이 이채롭다. 세찬 바람에 맞선 생존 전략인 것 같다. 대덕산은 말 그대로 대덕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산이다. 산의 덕스러움은 모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 좋기로 이름난 김천의 대표적 물줄기인 감천의 발원지가 바로 이 산이다. 정상부에는 헬기장도 두 개나 있다. 그만큼 너름새가 크다는 얘기가 되겠다. 대덕산 정상에서 15분쯤 내려서면 얼음골 약수터가 나타난다. 더 내려가서 덕산재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지만, 맛있는 물을 원한다면 이곳에서 수통을 채우는 것이 좋다. 얼음골 약수터에서 천천히 걸어도 50분쯤이면 덕산재에 닿을 수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는 필히 가끔씩 뒤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그 때가 마침 석양 무렵이라면 이우는 해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대덕산의 진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삼도봉 화합탑은 외려 지역감정 일깨우는 듯 대덕산이 허리를 낮추어 고개를 하나 여니, 그곳이 바로 덕산재(640m)다. 김천시 대덕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고갯마루로 30번 국도가
지나는 날씬한 포장도로다. 하지만 교통량은 극히 드물어 주유소도 휴게소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휴게소에는 산삼 판매소라는 안내문을 달고 있는데
인기척이 없다. 그래도 화장실은 개방돼 있어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대간 종주자를 위한 집 주인의 배려인 것 같다.
폐광터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부항령(690m)을 향한다.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고갯마루였던 부항령. 백두대간의 오래된
고갯마루인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부항현’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제는 고개의 구실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래로 삼도봉터널이 뚫렸기
때문이다. 고갯마루 일대에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드디어 삼도봉(1,177m). 민주지산의 봉우리로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루는 삼도봉은 경북(김천), 전북(무주), 충북(영동)에 걸쳐 있다.
지리산의 삼도봉(날나리봉)이 전남?북과 경남, 대덕산 전의 삼도봉(초점산)이 경남·북과 전북으로 불완전한 삼도인 것에 비해 온전한 삼도봉이다.
정상에 삼도봉 화합탑이 서 있는데, 오히려 지역감정을 일깨우는 것 같아 영 보기에 거북하다.
잔뜩 구름 낀 하늘이 아침을 재촉한다. 또 비가 올 것 같다. 날씨도 초겨울로 돌변한다. 미역국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다음 서둘러 짐을
꾸린다. 조끼를 입고도 모자라 재킷까지 꺼낸다. 모자까지 단단히 썼는데도 오한이 들 정도다. 마지막 산행 날이 늘 그렇듯이 바닥난 체력과
무관하게 발걸음이 가볍다. 거기다가 트레일도 좋고 오르내림도 가볍다. 이번 종주 중 가장 편안한 구간이다.
드디어 질매재(730m).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3) 백두대간이 우리나라의 으뜸 산줄기라는 말은, 대부분의 명산이 그 안에 포함돼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비산비야의 형국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산도 많다. 특히 이번 구간처럼 경상, 충청 내륙의 산들은 어쩌면 섬보다 더
접근이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종주자들은 대중교통수단이 닿는 곳까지 와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하게 되는데, 더 번거로운 것은
하산 후 차를 둔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있다. 여관이나 민박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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