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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 주왕산

작은岳馬 2006. 1. 14. 14:35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통틀어 '참나무'라고 합니다. 참나무의 '참'은 진짜란 뜻입니다. 참나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도토리의 모양도 조금씩 다르지만 잎의 모양도 각자 다릅니다. 이곳의 참나무는 낙엽이 지는 넓은
  잎 (활엽수) 키 큰 나무입니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우리나라 문화를 소나무 문화라고도 합니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솔가지로 금줄을 만들어 나쁜 기를
  막아냅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소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며 솔잎으로 송편과 솔잎술을 만들어 먹고 송진으로
  불을 밝혀 독서와 바느질을 하였습니다.

  소나무 밭에서는 송이버섯이 나고, 자랄 때는 소나무 밭에서 뒹굴며 소나무로 만든 지게에 나무를 해 나르고
  농사를 짓습니다.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묻히게 되는데 태어나 자라고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은 소나무와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문화를 소나무 문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를 거쳐 영덕, 청송일부(주왕산국립공원 포함)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습니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 하고 춘양목(春陽木)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소나무는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의 나무로 쳤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소나무 보호를 위하여 나무의 벌채를 법으로 금하는 등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금강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어 한강수계(水系)로의 운반이 불가능한 울진, 봉화지역에서는
그래도 생명을 부지하여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영주 ~ 봉화 ~ 태백으로 이러지는 산업철도가 놓이면서
이들도 무차별 벌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잘려 나온 금강 소나무는
경북 봉화 춘양역에서 온 소나무란 뜻으로 춘양목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금강 소나무(춘양목)는 소나문의 한 품종입니다.

 

  ※ 소나무의 형제들

 

소나무(육송,솔) 

 잣나무

 리기다소나무(세잎소나무)

 -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라는 늘
   푸른 바늘 잎(침엽수) 키 큰
   나무이며, 줄기 윗부분의
   나무껍질은 적갈색이며 잎은
   2개씩 짧은 가지에 붙는다.

 -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라는 늘
   푸른 바늘 잎(침엽수) 키 큰
   나무이며 잎이 5개씩 달리며
   열매를 잣이라 하고 식용,
   약용으로 쓴다.

 - 북아메리카 원산지인 늘 푸른
   바늘 잎(침엽수) 키 큰 나무이며
   잎이 3개씩 달리며 큰 줄기에서도
   잎이 나온다.

 

 

  ※ 주산지

이 저수지는 조선조 숙종 46년(1720년)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경종 1년)에 완공하였다. 하류지역의
가뭄을 막기 위한 것으로 주변 경관과 저수지 가운데에
왕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어 아름다운 호수가 되었다.
특히 계곡 안쪽에 높이 솟구친 '별바위'에 가을 단풍이
들 때면 옜날에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파란
하늘을 담고 있는 주산지의 경치는 가히 자랑할만 하다.

 

  ※ 왕버드나무

왕버들은 가지가 굵고 튼튼하며 버드나무 종류이면서도
거의 늘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30여종의
버드나무 가운데 왕이라 할 만하며, 왕버들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왕버들은 숲 속에
들어가서 다른 잡스런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고 아예
개울가,호숫가 등 유난히 물이 많은 곳만을 선택하여
어릴 때 빨리 자라 버림으로써 다른 나무들을 압도한다.
왕버들은 습기가 많은 곳, 때로는 거의 물 속에 잠긴
채로 수백년을 넘게 삶을 이어간다. 지금도 경치가
빼어난 유원지나 경승지의 하천가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자라는 곳이 많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활엽수) 키 큰 나무로서 잎은 긴 달걀 모양이며 새순이 돋을 때는 주홍색을 나타내는 것이 이 나무의 특징이다.


 

  주왕산국립공원은 한국 식물분포대로 보면 온대남부산림대에 속한다.

  상록침엽수림 및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는 온대중부의 대표적인 식생태를 갖고 있는 지역으로 주요식물로는
  우단꼭두선이, 망개나무, 둥근잎꿩의비름, 노랑무늬붓꽃 등 이 있다. 특히 둥근잎꿩의비름은 주왕산 계곡에만
  분포되는 식물이다. 그리고 이곳은 동물들이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이루고 있어 양서류를 비롯한 파충류,
  조류, 포유류등 이 전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농경지 주위에는 오소리, 청설모, 등줄쥐, 너구리
  등과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멧비둘기, 곤줄박이 등이 분포되어 있으나 조류는 빈약한 편이다.

  주요 식물상은 목본식물로 소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갯버들, 느티나무, 서어나무, 망개나무,
  초본식물로 달뿌리풀, 물억새, 깽깽이풀, 둥근잎꿩의비름, 연복초, 미치광이풀, 솔나리, 큰바늘꽃 등 749종류가
  분포한다.

  주요 식물군락은 소나무군락, 굴참나무군락, 졸참나무군락, 신갈나무군락, 달뿌리풀군락, 물억새군락,
  갯버들군락, 느티나무군락, 서어나무군락, 고마리군락 등이 분포한다.

 

 

 

 

수달
(천연기념물)
- 멸종위기야생동물

 

붉은배새매
(천연기념물)

 

황조롱이
(천연기념물)

 

 

소쩍새
(천연기념물)

 

까치살모사
(보호야생동물)

 

망개나무
(보호야생식물)

 

 

솔나리
(보호야생식물)

 

노랑무늬붓꽃
(보호야생식물)

 

깽깽이풀
(보호야생식물)

 

 

 

 

둥근잎꿩의비름
(보호야생식물)

 

피나물

 

패랭이

 

 

족도리풀

 

제비꽃

 

원추리

 

 

초롱꽃

 

각시붓꽃

 

얼레지

 

 

땅나리

 

등칡

 

둥근잎꿩의비름

 

 

노루발꽃

 

노랑무늬붓꽃

 

깽깽이풀

 

 

금낭화

 

연리목2

 

연리목2



 

주왕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어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기암으로 산에 들어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주왕이 신라 마장군과 일전을 벌일때 이바위에 이엉을 두르고 쌀 뜨물을 흘러 보내 적을 현옥시켰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웅장한 자태는 주왕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에서 약 2km 거리에 위치한 주산지는1720년 8월 조선조 숙종 46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10월 경종원년에 준공하였으며 6천여평 남짓한 면적 으로 60여 가구가 이 물을 이용, 농사를 짓고 있다.

길이 100m, 넓이 50m, 수심8m의 아담한 이 호수가 주왕산 연봉에서 뻗친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이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라 잠시나마 속세를 잊고 휴식을 취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또 이 호수는 준공 이후 현재까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말라 하상이 드러난 적이 한번도 없으며, 호수 속에는 약 150여년이나 묵은 왕버들 3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어 그 풍치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또 이 호수 제방위에는 이공(李公),성공(成公)의 송덕비가 있으며 비문에는 일장저수(壹障貯水),
  류혜만인(流惠萬人), 불망천추(不忘千秋), 유일편갈(惟一片碣)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경사 90도의 가파지른 절벽의 모습을 한 학소대(鶴巢臺)는 급수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있다. 해방전 이 정상지점에 청학 백학 한쌍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일인(日人)포수가 백합을 쏘아 잡아 버린후, 날마다 슬피 울면서 부근을 배 회하던 청학마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지금은 옛 보금자리만 남아있다.

또한 학소대 중간쯤에 수백년 묵은 풍채가 좋은 회양목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이 탐이나서 톱을 허리에 차고 암벽을 기르다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있다.

  이처럼 학소대는 애닯은 사연이 얽혀 있으며 주왕산의 경관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기암이기도 하다. 오른쪽의
  바위는 마치 병풍을 세운듯하여 병풍바위라 부른다.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같아서 시루봉이라 불리우는데
  밑바닥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시루봉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옛날 어느 겨울철 도사가 이바위 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멀리서 보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급수대는 망월대에서 50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37대 선덕왕이
  후예가 없어서 무열왕 6대손인 상재 김주원을 38대왕으로 중대 및
  각부대신들이 추대하였는데 즉위 직전에 돌연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고자 내란을 일으킴으로 김주원이 왕위를 양보하고 석병산으로
  은신하여 대궐을 건립한 곳이다.


  
대궐터는 급수대 정상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유적이 남아있다.

  
김주원이 대궐을 건립하여 은둔생활을 할 당시 산상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서 식수로 하였으므로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급수대앞 오솔길을 지나노라면 계곡쪽으로 기울어진 깍아지른
  절벽이 금새 무너질듯하여 식은 땀조차 흐르게 된다.

 

  기암에서 내부로 깊숙히 이어지는 길옆 냇가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아들바위란 것이다. 왼팔로 던진돌 이 그 바위에 얹히게 되면
  생남을 한다는 전설이 있어 호기심에서 누구나 한번씩 왼손으로 돌을
  쥐고서는 바위 반 대편에 돌아서서 양다리 사이로 던지고 지나간다.

  그래서 그 바위에는 언제나 넘치도록 자갈이 쌓여져 있다.

  
봄이면 수달래가 아들바위를 스쳐가는 여울물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주왕암 뒤안길 오른편에 협곡이 있다.
  
파란 하늘이 아득히 내다 보이는 좁은 바위틈 길을 따라 30m쯤 들어가면
  거대한 암벽에 부딪치게 된다.

  
약 50여m 되는 절벽 하단에 세로 5m, 가로 2m 정도의 동굴이 있는데
  주왕이 마장군에게 쫓겨서 숨어 살았던 동굴 이다. 깊이 2m 정도의
  굴속 구석진 곳에는 탱화(부처님의 불상 그림)가 안치되어있고, 굴에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가파른 암벽이어서 쇠다리를 잡아야 올라갈 수
  있는데, 절벽 정상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의 포말로 인하여 오색
  찬란한 무지개가 꿈처럼 서린다.

  주왕이 천연의 요새인 이 곳에서 대망의 꿈을 저 버리지 않고 재기를
  다짐하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관음봉(觀音峰)은 주왕암 뒷편에 있는 묘한 암봉으로, 그 생김새가 관음보살을 닮았다고 하여 관음봉이라
  부른다.
  소용돌이치듯 백팔번뇌가 쌓이고 구만리 장천을 찌를듯이 우뚝 솟은 바위가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서 아름답고
  숭고하기가 비할데 없다.

  
이곳은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역사가 있고 진리가 숨쉬고 있는 자랑스러운 옛
  터전이다.

 

봉우리의 형체가 흡사 연꽃 같다고 하여 연화봉(蓮花峰)
이라 부르며, 이곳에서도 대전사의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삼라만상이 고이 잠든 밤, 극락세계의 상징인 연꽃속에
묻혀 사바세상의 번뇌를 잠시나마 잊고 싶거든 연화봉
정상에 올라보라. 몸과 마음이 절로 청정해짐을 느낄수
있다.

 

자하성 뒷편으로 해서 개울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잡목으로 둘러싸인 연화굴(蓮花窟)에 이른다. 굴이라고
해서 그리 깊지는 않지만 너비3m, 높이5m, 깊이2m의
이 동굴속에서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이곳에서 성불했다는
이야기도 해진다.
뿐만 아니라 연화굴을 통과하는
시원스럽고 맑은 계곡의 바람은 현대문물에 찌든
현대인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이곳에서 자하성과 무장굴 쪽을 바라보며 그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렇게도 허망하게 멸망해버린 자칭 천자 주왕의 원혼이 곳곳마다 서려 있는 것 같다.

 

학소대를 조금 지나면 제1폭포(일명: 선녀폭포) 입구가
보인다.

옛날에는 이 폭포에 다다르자면 쇠사슬을 붙잡고 겨우
오르내렸는데 일제강점기 무렵 내원에다
제탄전습소(製炭傳習所)를 설치하기 위하여 차도를
개설하느라고 그토록 아늑하고 신비하기 그지없었던
자연의 신비경을 훼손하여 버렸다.


폭포 주위는 암벽으로 둘러 싸여져서 바람한점 없이
고요하며, 다만 그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폭포소리뿐이다.

  그 물보라 속에는 항시 오색무지개가 어리고 있어 당장 이라도 선녀가 하강할 듯 절경을 이룬다. 소(沼)는 70평
  남짓하게 이루어져서 물고기떼가 놀고 있으며 옛 전설에 의하면 소 깊이가 명주꾸리 하나를 다 풀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암벽 틈바구니에는 기화요초가 보석같이 아름답게 피어 있으며, 암벽사이로 트인 구만리 장천엔 구름이 뭐 그리
  바쁜지 쏜살같이 지나간다.
  폭포 바로 위에는 선녀탕과 구룡소가 있으며,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신선대로 간다고 한다.

  
산 아랫마을 상의리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면 3일 이내에 비가 왔다고 한다.

 

   제1폭포에서 2km 거리에 있다.
  
두줄기로 이루어진 2단폭포인데, 한줄기는 호박처럼 파인 곳에 일단
  쉬었다가 다시 떨어진다.

  
유명한 조각가의 창작품같이 오묘한 미를 지녔다.

 

  제1폭포에서 3km정도 거리에 제3폭포가 있다.
  
이 폭포도 2단 작용으로 그 규모가 주왕산 폭포 중에서 제일 대범하다.

  
폭포수는 계곡을 따라 제2폭포, 제1폭포를 거쳐 주왕산 골짜기를
  누비는데, 사시로 끊임없는 나그네 길을 다람쥐와 도 이야기하고
  백련낭자가 꿈을 부르던 연화굴을 스치고 수달래(水丹花)도 곱게
  가꾸면서 주방천을 흐른다.

  또한 이곳은 심산유곡이어서 노송에는 항상 백로가 놀고 간다. 이
  폭포에서 왼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화전민이 살았던 내원마을이 있는데,
  내원산에서는 산삼이 있고 희귀한 약초가 자생하여 화전민들이 채취하여
  시장에 판매하기도 했 다. 지금도 4~5가구가 약초등을 캐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또한 희귀목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송읍 월외리에 위치하고 있어 월외폭포라고도 부른다.
  
높이 11m의 남성적인 폭포로 항상 물보라가 안개처럼 주위를 감싸고
  있어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하다.

 

  부동면 이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경관이 외주왕 못지 않게
  수려하다.

  
경관도 뛰어나지만 조용한 곳에서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곳이다.

 

  꽃 빛깔은 진달래와 비슷하나 약간 진한 편이며 특이한 것은 꽃잎
  하나에 반드시 20여개의 검붉은 반점이 있다.
  옛부터 늦은 봄에서 초여름 사이 주왕산 안 주방천에서는 아름다운
  빛깔의 수달래가 꽃을 피우는 것을 놓고 이곳 주민들은 주왕산으로
  도망 온 주왕이 숨을 거두면서 흘린 피로 꽃이 생겨났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주왕이 패전한지 이미 천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당시 주왕이 쌓았다는 30여리의 자하성(紫霞城) 일부가
  그 때를 입증하듯 이끼낀 돌더미로 남아 칡 넝쿨 등이 얼크러진 덤불속에 묻혀있다.

  
자하성은 대전사에서 동편으로 약1km지점에 있으며 주왕암 입구에 나한봉(羅漢峰)을 거쳐 가로막은 돌담이다.
  이 성은 주왕이 신라군사를 막기 위해 쌓은 30여리의 성이다.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였으니 그 성에는 돌문과 사창(司倉)등이 있었으며 곳곳에
  부서진 성지의 잔해가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칡넝쿨을 헤치고 자하성 옛 터전을 오르면 한 여름의 무더위도 씻은 듯이 가셔지고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러
  전신 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된다.

  
성숙하고도 아름다운 수목에서 내뽐는 향기와 이름모를 산새소리에 마음 젖어 있노라면 절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주왕암 약200m 못미쳐 오른편 산록에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장굴(武藏窟)이다.

  
이 굴은 주왕의 군사들이 무기를 은닉했던 곳이었다고 전해 오는데,
  굴속으로 6m쯤 들어가면 암석이 가로막고 있고 그 구멍이 어린애도
  빠져 들어갈 수 없이 적어서 더이상 안으로 전진할 수가 없다. 더욱이
  성냥불을 커면 금새 꺼져 버릴 정도로 산소가 적어서 호흡도 곤란해진다.


  
가을철 무장굴 앞에서 주왕암쯤 산경을 바라보면 칭칭이 어우러진
  단풍이 일품이다. 무장굴 뒷쪽에 솟아있는
  봉우리로, 나한님들이 모여있는 형상 같다하여 나한봉(羅漢峰)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선사의 높은 뜻이 깃들여진 준엄한 나한봉을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사적이 궁금해 진다.

 

  무장굴 뒷쪽에 솟아있는 봉우리로, 나한님들이 모여있는 형상 같다하여 나한봉(羅漢峰)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선사의 높은 뜻이 깃들여진 준엄한 나한봉을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사적이 궁금해진다.

 

  주왕암 뒷편 칡넝쿨이 휘어 잡고 가파른 산을 오르면 정상에 잔솔밭이 평화스럽게 모여 있는데, 이 곳이
  무열왕 6세손 김주원(강릉김씨의 시조)이 집을 짓고 공부를 했던 터전이라고 한다.

  
산정은 약50평 남짓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도 이끼낀 기왓장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정말로 강릉김씨
  시조가 이곳에 살았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훈풍을 마음껏 마시면서 운무에 쌓인 산경을 바라보면 향로봉,
  촛대봉, 석가봉, 미륵봉, 지장봉 등 그외에도 만악천봉(萬岳千峰)이 쌓여져 있어 금강산 1만2천봉을 연상케하는
  소금강(小金剛)의 면 모를 갖추고 있다.

 

  제1폭포 입구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외양이 늠름하고 위엄있는 암석이 우뚝솟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선대(神仙臺)이다.

  
이곳의 경관은 매우 아름다우며, 신선대위에는 선녀들이 놀았다는 보금자리가 있다. 청명한 달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인접한 제1폭포 위에 있는 선녀탕에서 목욕을 하고 신선대위에서 놀다 갔다고 한다.

 

  자하성을 조금지나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나즈막한 산허리에 열두폭 병풍을 둘러 놓은 듯한 바위군이 따사로운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펼쳐진다.

  
자하성에 보금자리를 둔 산새들이 간혹떼를 지어 석병산(石屛山)으로 가랑잎처럼 날아가는 정경을 바라보노라면
  속세를 떠나 별천지에 온 느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 진다.

 

  주왕암에서 급수대로 가는 중앙지점 왼쪽편에 망월대가 있다.
  
4, 5명이 앉을 정도로 편한 자리여서 이곳에서는 사면을 두루 살필수 있고 드높은 하늘도 마음껏 바라 볼 수
  있다.

  
주왕암 협곡에서는 달을 바라볼 수 없어 대전도군과 백련낭자가 이 망월대 위에서 달을 보면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고려 태조2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해 세운 절이라는 설과 신라
문무왕12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보광전 앞뜰에 세운 두개의 석탑에 새겨진 조각이나
주변에서 발굴된 불상과 유물의 연대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본래는 매우
큰 절로서 많은 승려가 있었다는데 역사가 오랜
절이어서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보광전과 명부전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여기저기
들어나 있는 주춧돌들이 그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다.

○ 주소 : 경북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200번지
○ 전화 : 054) 873-2908

 

대전사 동쪽 비탈진 계곡을 올라가면 안절이라는
별칭이 있는 주왕암이 있는데 이 암자는 대전사와
함께 창건되었다 하며 주왕의 혼을 위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문간채인 가학루는 중충 누각으로
되어 있고 기와는 이끼가 그윽히 끼어 오랜 풍상을
보여주며 16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전이 있다.

○ 주소 : 경북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200번지
○ 전화 : 054) 873-2216

 

대전사 건너편 옥같이 맑은 개울물과 병풍처럼
에워싼 사철나무에 감싸인 백련암은 대전사와 함께
지은 절로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이 암자에는 큰 종이 있어 새벽마다 산야에
은은한 종소리가 스몄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종은
없어지고 오직 그윽한




 

 

천년이 넘은 고찰 대전사는 주왕산 전설과 함께 재미있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는데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에 위치한 대전사의
경내에는 지금도 우물을 메운 흔적이 있고 이 우물에 얽힌 얘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어느 스님이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를 매일 냇가에서 길어다가
올리곤 했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물을 떠다 공양을 올리니 귀찮기 그지없어
스님들이 의논을 한 결과 앞뜰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길어 청수로 사용했다.

얼마 후 이 절에 불이 나서 절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그 뒤 성지도사가 와서
지세를 보고 하는 말이 대전사는 터가 부선형(浮船形) 즉 배가 바다에 떠서
항해하는 혈(穴)이라 여기에 우물을 파니 배바닥에 구멍이 뚫은 격이 돼
불이 나서 절이 타게 되었다면서 우물을 메우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대전사의 오른쪽 밭 가운데 우물을 메운 흔적이 남아 있다.

 

 

청송읍 거대리 동쪽 골짜기에 오래된 절이 한 채 있었고 이 절을 뒤로 하여
지름길로 자주 쓰이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옛날 어떤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명산 대찰을 찾아 다니던 중 날이 저물어갈 무렵 이 거대리 절골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기 위해 어느 큰 기와집 대문 앞에 와 주인을 찾으니
아리따운 처녀가 소복을 하고 나오기에 이상히 생각하며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 청하였으나 그 처녀는 거절하면서 사연을 얘기했다.

원래 처녀의 집은 부자로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형제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매년 오늘밤에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집안 식구 한 사람씩을 물고 가서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뿐이라며 오늘밤에는 마지막으로 자기도 잡혀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젊은 선비는 그 처녀가 너무나
측은하게 여겨져서 그 괴물의 정체를 꼭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선비는 처녀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술
한 독과 고기며 과일을 갖춘 음식을 차리도록 부탁하여 저녁을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상은 문 앞에 차려놓고  
큰 촛불을 가져오게 하여 집안을 밝게 비춘 다음 명주실 한 타래를 준비하여 여러개의 고리를 만들어 방문 앞
음식상과 술독 주위에 펴놓은 뒤 처녀를 벽장 속에 숨겨두고 대청마루에 칼을 쥐고 누워 있었다.

이윽고 한밤중이 되자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불빛에 번들거리는 거대한 괴물이 지붕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혀를 널름거리며 내려오는지라 이를 본 젊은 선비는 칼을 빼어 괴물의 등을 힘차게 내리쳤더니 괴물은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명주실 고리가 목에 감긴 채 숲 속으로 사라졌고 명주실 타래도 풀려나갔다.

이윽고 한숨을 돌린 선비가 괴물과 싸우는 소리를 듣고 기절한 낭자에게 물을 끊여 먹여 소생시키고 나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선비는 아침 밥을 든든히 먹고 명주실을 따라 숲속으로 가보니 명주실은 절 뒤 큰 바위 밑에 있는 굴로 들어
갔다. 굴을 따라 들어가려다가 굴 입구에 나무를 쌓고 불을 질렀더니 얼마 후 뜨거운 불에 못 이겨 괴성을
지르며 천둥소리와 함께 등이 그을린 큰 지네 한 마리가 굴 밖에 나와 쓰러졌다. 선비는 준비한 칼로 지네를
찔러 죽이고 낭자와 백년가약을 맺고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부동면 항동과 영일군 원담의 경계에 외지고 따로 떨어진 부자의 큰집에는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붐볐고 이를 접대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편히 쉴 틈이 없었다. 부자 내외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편히 좀 쉬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부자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날도 역시 찾아온 손님 접대로 분주하던 부자 아내는 지친 표정으로 사정을 얘기하면서 무슨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스님은 "그렇다면 방법이 있긴 있지" 하며 집 앞의 길을 끊어 놓으면
손님이 없을 것이라 이르고 총총히 사라졌다. 

부자 내외는 이튿날 날이 밝자 하인을 시켜 길을 끊게 했더니 연못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그로부터 손님은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많던 재물이 까닭없이 줄어들어 끝내는 집안이 망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부자 내외가 끊어버린 길이 용의 형상을 한 뒷산의 등줄기인 '청룡맥'이었으며 부자가
갑자기 망한 것은 청룡맥, 곧 용의 허리를 끊어 놓았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냇가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붉은 수단화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은 채 슬픈 사연을 안고 다소곳이 꽃을 피우고 있다. 수단화
또는 수달래란 이 꽃은 다른 지방에선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꽃으로 여기
주왕산 계곡에서만 피는데 꽃 빛깔은 진달래와 비슷하나 약간 더 붉은
편이며 생김새는 철쭉(연달래)과 비슷하고 그 키나 나무의 생김새도
철쭉이나 진달래와 닮은 데가 많다. 5월초에 계곡을 따라 수단화가 피면
꽃이 냇물에 비춰 붉은 물이 흐르는 듯 해서 볼 만 하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수단화에는 남 모르는 서러움이 숨어 있으니 주왕이
이곳에서 신라군사와 싸우다 힘이 다해 마장군 형제의 화살에 맞아 잡히자
그의 피가 주왕굴에서 냇물에 섞여 계곡을 따라 붉게 흘러 내렸는데 그
이듬해부터 이 주왕산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꽃이 계곡과 내를 따라
피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주왕의 피가 꽃이 되어 핀 것이라 해서
수단화(壽斷花)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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