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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에 얽힌 전설 중국의 동쪽에 있던 진나라에서 복야상서란 벼슬을 지낸 주의 8대손 동의 아내 위씨는 40세가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두 내외는 옥정산에 가서 기도를 하며 소원을 빌었더니 영태 11년(서기 775년) 인월인일(1월1일) 인시(오전3시-5시)에 저성(28수의 3번째별)이 자기 품암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깨니 꿈이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석달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날도 인월인일 인시라서 아이는 태어난 즉시로 골격이 장대하고 이가 나 있었다. 또한 아들이 태어난 날 옥정산 흰색범이 산돼지 한 마리를 몰고와서 집안에 두고감으로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그로부터 3일후에 여남공 동씨는 이는 경사로운 뜻이라 여기고 잔치를 베풀고 많은 손님을 청하여 즐기는
가운데 아기의 이름을 도라 하고 자는 광로라 했다. 어느날 광로는 그의 아버지 여남공을 보고 하늘은 어찌하여 높이 있고 땅은 어찌하여 낮게 깔려있음이니까 하고 물었는데 아버지 여남공은 대답을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광로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비범하고 5세때부터 글을 배우게 되니 한번 들으면 잊지않는 두뇌에 시전 서전에 능통하였고 11세때는 이미 천문지리와 육도삼략을 통달하였다. 그후 성인이 된 광로는 장사 백여명을 거느리고 웅이산에 들어가 만여명의 군중을 모으고 남양땅에 웅거하니
당 덕종황제 정원 15년이었다. 이에 당나라 황제는 주도를 잡기 위하여 당나라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하다가 알아보니 신라땅으로 도망을 갔다는 정보를 얻어 신라왕에게 역적을 잡아 달라고 의뢰하였다. 신라왕은 즉시 동평장사 마일성을 상장군으로 삼아 추격하였다. 주왕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다만 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관동(지금의 강원도)으로 도망하였으나 원성현령-원주성주 천해고에 폐하여 평주로부터 진성(지금의 청송군 진보면)땅에 이르러 석병산(지금의 주왕산)이 매우 깊고 험준하다는 말을 듣고 주왕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한편 마일성 장군과 사이가 좋지못한 염세청이란 사람이 당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려 신라왕과 마일성이 주도와 더불어 음모하여 당나라를 치려한다고 고하니 당나라 황제는 크게 노하여 부하 장수에게 명하여 빨리 신라를 쳐부수고 주도를 사로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당나라 장수는 왕의 명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라왕이 동쪽나라에 있으면서 형제의 우의를 극진히 해왔거늘 이제 작은 도적으로 인하여 일개인의 시기심에서 일컫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츠켜 만리원정에 나서면 그 경비 또한 적지않고 신라왕이 진실로 군사음모를 하지 아니하였다면 정벌함이 옳지못한 일이오니 신라왕에게 얼마나 그릇되고 황송한 일이 되겠나이까 하물며 도적 주도가 대국으로부터 소국으로 쫓겨 갔으니 신이 생각하기로는 신라나라 사람들이 대국에 인물이 없다하여 경시할까 염려되는 바이옵니다 하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즉시 출병함을 그치게 하고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주도를 속히 잡아 달라고 함에 신라왕은 상장군 마일성으로 하여금 주도를 잡으라 하니 마장군은 그의 아우 이성을 천거하여 선봉장으로 삼고 삼성 사성 오성으로 후장군을 삼아 기마병 백대와 대군을 이끌고 갑오년 10월 그믐날에 진성땅에 이르니 눈이 한길이 넘게 쌓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눈이 녹을때까지 진을 치고 일단 머물게 되었다. 이에 앞서 주왕의 아들 희가 네 살적에 그의 어미니 기씨에게 글을 배우더니 충효 두글자를 보고 그 뜻을 어머니에게 묻기를 무엇을 충성이라 하고 무엇을 효도라고 합니까?라고 하니 그의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임금님을 섬기되 몸을 바쳐 나라의 일을 성심으로 수행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어버이를 섬기되 힘을 다하여 봉양하는 바를 효도라한다고 일러주었더니 아들 희는 책을 덮어놓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사람이 충성과 효도를 행하면 다시 무슨 서적을 구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성경현전을 여가하는 날에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한다. 8,9세때에는 천문역수을 일일이 관통하였으며 주왕이 정의의 길을 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국권을 빼앗으려 할 때에 그의 아들 희는 아버지께 동병하시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 아버지께 말하기를 아버님이 어렸을때에는 할아버지께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이치를 물으셨다 하오니 천존지비 군신상하의 분별이나 가히 범할 수 없습니다. 진나라가 망한후 백년이 지난 것은 곧 천벌이니 운수의 흥망성쇠는 비록 성현이라 한들 막지 못하거능 하물며 당나라의 옷을 입고 밥을 잡수시니 무슨 이유로 당나라를 배반할 뜻을 두십니까 천명을 거스리는 사람은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하오니 엎드려 비오니 돌이켜 생각해 주옵소서 또 천문을 살펴 보오니 아버님의 직성이 복을 누릴 수 있으나 광체가 없으니 가히 큰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니 임금님 덕에 복종하는 것이 옳을 줄 생각합니다. 귀화하면 목숨은 보존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입니다라고 희는 자식된 도리에 간곡히 만류하고 간하였으나 주왕은 종시 등지 않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다가 부모와 자식은 골육의 은혜가 있나니 내가 저버릴수 없다하여 아버지를 따라 요동땅에 이르러 당나라를 떠나올 때에도 울부짖으며 따라왔으니 그때 희의 나이 열아홉이였으니 동료들이 그를 대전도군이라는 호로 불렀다. 대전도군이 석병산에 들어와서부터는 기암석상에 단정히 앉아서 시간을 아껴 숙야(이른아침과 늦은 밤)로 정신수도 하고 때로는 저성(28수의 셋째별)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생각하여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11월 갑인일에 신라국 선봉장 마이성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주왕이 장수 단수필에게 명하여 나가 싸우게 하니 단수필은 군사를 거느리고 송평 서쪽에서 싸우다가 마장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선봉대장 마이송이 싸움에 승리를 거두어 석병산 문턱에 이르니 대전도군이 하늘을 우러러 세 번 절하고 연화전(지금의 연화굴)앞에서 마이성을 쏘았다. 마이성은 백근 철퇴로 화살을 막으므로 또다시 대전도군이 활을 쏘아 마이성의 투구를 쏘았다 화살과 투구가 함께 남으로 10리 밖에 떨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투구 떨어진 밭이라 하여 그 밭이름을 마주전이라고 하였다. 마이성이 크게 화가나서 친히 북을 울리며 총 돌격전을 전개하여 들어가니 도군이 장군 석중철에 명하여 접전케 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싸움은 일진 일퇴로서 좀체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때 마이성은 세 번싸워서 세 번 위험한 고비를 당하였으므로 지금도 그싸움 터를 삼위동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이성이 석중철의 힘을 당하지 못하여 삼의도에서 진을 굳게치고 나오지 않고 마삼성 장군은 물러가서 고라동(지금의 라동)에 있다가 3일이 지난뒤에 자발현에 주둔하고 마사성 장군과 마오성 장군은 각산에 들어가 복병을 두었다가 을미년 3월 갑자일 밤에 관음봉을 넘어 석병산 꼭대기에 이르러 사방으로 망을 보고 진세를 살피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양평군사는 모두 지쳐 있으나 더욱이 숫적으로 적은 주도의 군사는 고전을 거듭하였으므로 많은 목숨을 잃고 더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조차 없었으며 더욱이 마이성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처지라서 군량이 떨어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사들은 병들고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게 되니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군사를 삼인조로 만들어 야간활동을 하게 되었다. 삼인조 군사들은 칠야를 이용하여 마을로 내려가 식량을 구하는 작전이었다.
험준한 절벽을 넘어 산봉우리와 계곡 속을 모조리 뒤져도 주왕 일행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아마도 이곳에 동굴이 있어 그속에 숨어 있을 듯하니 동굴을 찾아 보자고 결론을 짓고는 무장굴 연화굴 등 굴을 거의 뒤져보왔으나 허사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주왕이 숨어 있는 암굴(주왕굴)은 천길 낭떠러지인데다가 암굴 입구를 낙수가 가로막고 있었음으로 그 천연의 요새지를 발견할 수가 어려웠다. 이곳에 숨이 갇히게된 주도와 그이 부하장수 및 백련낭자의 생각은 마음이 착잡하였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일어나 살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주왕은 너무나 안전한 곳이라 믿고 어느날 주왕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에 낫을 씻다가 때마침 주왕을 찾고 있던 마장군에게 들켜 그의 화살을 맞고 자칭 후주천황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마장군은 이여서 대전도전을 잡으려 하엿으나 대전도군과 백령낭자는 재빨리 피해서 남쪽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로서 주왕이 이국땅에 온지 3년동안의 은신생활은 끝이 났으나 비록 타국의 장군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마장군이 주왕의 목을 갖고 신라왕에게 바치니 신라왕은 사신을 시켜서 주왕의 머리를 가지고 당나라로 가게했다. 이리하여 시신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돌연히 풍랑이 크게 일어나며 배가 전복되어 주왕의 목을 잃어버려 강을 건너지 못하고 뒤돌아 왔다. 어느날 태풍이 심하게 일고 모래와 돌이 하늘높이 날아올라 사람들은 문밖에 얼씬도 못했는데 이때 대전도군이 주왕의 시체를 거두어 석병산 북쪽에 장사하였으니 그날이 압록강에서 주왕의 목을 실은 배가 전복된 그날이라한다. 대전도군을 잘아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전도군이 효성이 지극한 소치로 장사날에 주왕의 머리를 실은 배가 풍랑으로 전복되었다고 했다. 장사를 지낸 후에 분봉이 없는 고로 후세 사람들이 주왕의 무덤을 알 수없다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왕이 만일 출천지효자가 아니었던들 어찌 이국땅에서 3년간의 세월동안 목숨을 보존했겠느냐고 말하면서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화성동(석병산 남쪽 30리 밖에 석름산=서쪽에 있음) 제자들과 함께 이르니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나와 길을 막고 크게 울부짖으면서 달려 들므로 대사가 꾸짖어 말하기를 호랑이야 듣거라 네가 비록 미물의 짐승이지만 대전 도군을 몰래 보느냐 우리는 승일행이다하니 그제서야 호랑이 들은 머리를 숙이더니 물러갔다고 한다. 이리하여 도리어 이곳에다 암자를 세워 대사와 함께 지낸지 31년만에 대사가 서역의 영은사를 중수하고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화사동을 떠나갔다. 그후 대전도군은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나서 어떤 스님한분이 찾아와서 "소승은 옛적에 같이 있던 대사였는데 다시 인간세상에 환생하였기에 옛날 인연을 찾어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대전법사는 이말을 듣고 감개 무량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사께서 서역에서 떠나신후로 전연 소식이 없더니 이제야 옛날 대사님을 뵈오니 반갑기 한량없습니다. 대사께서 이곳을 떠나신후 40년전에 적성별이 서토에 떨어짐을 보고 항상 마음속 의아했더니 하면서 시한수를 지어서 스님께 주었다. "오심년전사고인금인래도인면이라 하였으니 즉 50년 전에 친구를 이별하였더니 이제 사람이 찾아와 옛 친구를 다시 보는구나 라는 뜻이다. 그 스님이 글을 받아 보고 여러차례로 낭독하며 숙세(이 세상에 태어나서 전의 세상 곧 전생의 세상)의 인연이 깊은 것을 강조하였다. 그후 법사는 먹지 않아도 주림을 능히 견디어 나가고 모발이 항상 육십노인과 같이 성성한 백발노승으로 제자들과 같이 밤이면 건상의 28수의 별과 금성 화성 수성 등의 순환하는 도수를 담론하고 낮이 되면 오행의 동정하는 이치를 강론하였다. 어느날 한 제자가 말하기를 연전의 우리나라 산천의 형세를 살펴보니 산은 역패한 기운이 많이 있고 일어나 국가와 국민을 소란케할 우려가 있고 음탕한 남녀가 많이 생겨서 풍기가 문란하게 되고 윤리강상을 짓밟을 것입니다. 하니 법사가 말하기를 이나라의 땅에 살면서 이 나라를 위하여 염려하고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제화와 환난을 근절하는 것이 마땅할 일일 것이다.
삼라만상이 그 근본은 한 이치인데 대사가 서쪽나라로 간 후에 선사의 도를 누구에게 전하겠습니까? 하니 법사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열리고 사람이 죽고 태어나고 가고 오고 모이고 헤어지고 먼저 깨닫고 나중에 깨닫고 물이 맑고 바다가 넓은 것은 스스로 그때가 있는 것이다. 백년전이나 후나 간혹 특이한 인재가 나와 서로 전하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나의 법을 배우고 나의 도를 행하는 자가 시대의 인연을 따라서 이 나라의 이름을 전할 것이니 나의 도는 하나로써 둘을 전하고 둘로 하나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써 옛을 보고 옛으로써 현재를 보면 분명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법이 오래되면 후세에 아는 자가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그후 한 제자가 법사에게 이별을 하고 서천서역국(지금의 인도)으로 멀리 떠날 적에 법사는 그의 탁월한 재주를 칭찬하였다. 그 제자는 걸음을 걸으면서 법사의 인연을 못잊어 하는 표정을 짓고 떠나기 어려워 함으로 법사께서 속세의
인연이 다하였고 돌아 갈길은 만리 원정이나 탄식을 한들 조금도 유익함이 없다. 지금부터 천년이 지난후 세상에서 다시 만나리라 하였다. 법사님은 항상 흰사슴을 타고 다니므로 제자들은 법사를 백녹대인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때 그 의도를 배우는 자가 백여명이였다고 한다. 모발이 세 번 변하여도 법사의 동작과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사님이 도군이란 칭호를 들은 4년 스님 생활은 백여년 그 후 다시 주왕산에 돌아와서 살았는데 언제 어디서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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